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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를 씽씽~ 증기선 만들기 목록

조회 : 1309 | 2012-12-05

<실험 보고서>

작성일자 : 11월 xx일
실험 준비물 : 스티로폼, 구리관, 양초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멈췄다. 잠시 고민에 빠진 소년은 쓰던 종이를 구겨 뒤로 던졌다. 제멋대로 날아간 덩어리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새 종이 위를 달리는 펜의 소리가 덮어 갔다.

선장님께.
화려했던 단풍도 낙엽으로 변해 바닥을 물들이는 계절입니다. 가내 두루 평안하신지요.
일전에 말씀하셨던 건에 대해 제 나름의 답을 찾았기에 이리 편지를 보내 봅니다. 늘 바다 위에 계시는 분인지라 글이 제대로 도달할지 알 수 없지만, 마법 가루를 사용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희의 작은 요정은 성격이 비록 포악하기는 하나 마법 실력은 확실하니까요.

아시겠지만 제가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 - 당시에는 나이가 어려 몰랐으나 이제와 돌이켜보니 선생이 그리 신통치 않았음을 깨달은 바입니다 - 글 쓰는 실력이 워낙 부족하다 보니 대체적으로 지루하고 재미없는 졸문이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선생이 워낙 신통치 않아서 벌어진 일이니 애꿎은 저를 탓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일전…, 이라고 해도 10여 년 전의 일입니다만. 선장님께서 제게 문제 하나를 내셨지요. 그 답을 찾으면 다시 연락하라고 하셨고요. 그 말마따나 그때가 사실상 마지막 만남이었지요. (그 이후에도 많이 만났다고 하시렵니까. 제 사전에 의하면 그 상황은 ‘만남’이 아닌 ‘다툼’이나 ‘싸움’, 혹은 ‘전쟁’에 가깝습니다.)

10년이라면 굉장히 긴 세월이지요. 적어도 한 문제의 답을 찾기에는 지나치게 긴 시간입니다. 게다가 알고 보니 이 문제의 답은 굉장히 간단하더군요. 제가 아무리 10살짜리 어린애였다고 해도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아님 선생의 방에 늘어서 있는 책 중 한두 권만 보면 - 선생의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그의 장서만은 훌륭했다고 인정합니다 - 금세 찾아낼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때 바로 답을 말씀드렸다면 당신이 떠나지 않았으리라 후회….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거세졌다. 마지막 문장에 줄을 박박 그은 소년은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며 숨을 골랐다. 새 종이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다시 펜을 잡고 원래의 종이 위로 돌아갔다. 새까맣고 질 좋은 잉크 덕분에 완전히 자취를 감춘 마지막 문장 아래 새로운 문장이 이어져 갔다.

그렇지만, 아마 잘 아시겠지만, 그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정말 정신없이 바빴고 책을 볼 시간은커녕 답을 생각할 여유조차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 최대의 원인이 선장님이라는 사실은 아마 부정하지 않으시겠죠. 다행히 10년이라는 세월을 더 허비하기 전에 아주 작은 여유를 찾았습니다. 모처럼 휴전을 선포해주신 덕분에 이리 펜을 들 시간이나마 가질 수 있게 된 점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각설하고,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째서 이 작은 스티로폼 판자가 앞으로 나갈 수 있을까?’이것이 선장님의 질문이었지요. 전 바다의 흐름을 들었고, 바람의 힘이라고도 답했으며, 사람의 움직임이라고도 말했습니다. 답은 그 무엇도 아니었습니다. 그건 에너지가 오가고 물질의 상태가 변하며 일어나는 현상 때문이었죠.

스티로폼 판자 위에 꽂은 구리관 밑을 양초로 데우면 안에 있던 물이 끓으며 기화합니다. 물의 상태 변화랍니다.기체는 액체보다 분자의 이동이 자유롭기 때문에 액체가 기체로 변하면 부피가 확 늘어납니다. 구리관 안을 채운 수증기는 결국 구리관 밖으로까지 나오게 되지요. 여기까지가 1단계입니다.

밖으로 나온 수증기는 뒤쪽으로 밀려 나갑니다. 이 힘에 의해 가벼운 스티로폼 판자는 앞으로 나가게 되지요. 상대에게 힘을 가하는 물체는 자신이 가하는 힘만큼 물체로부터 힘을 받는다, 즉 ‘작용-반작용의 법칙’입니다.배 가장자리에서 마주 서서 선장님 손을 밀어냈을 때, 제가 선장님의 손을 밀었던 힘만큼 뒤로 밀렸던 것과 같은 이유지요. 성격은 나쁘지만 유능한 요정이 아니었으면 그 기분 나쁜 소리가 나는 악어 입으로 빠질 뻔 했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습니다만, 그건 넘어가지요. 어쨌든 증기선이 움직이는 이유는 저 법칙입니다.

여기에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하나 더 붙습니다. 양초가 가진 열에너지는 물이 수증기로 변하는 상태변화에너지로 변화한 뒤, 수증기의 힘으로 앞으로 나가는 배의 운동에너지가 됩니다. 에너지는 형태를 바꿀 뿐 그 총량은 계속 일정하다는 이야기입니다.외부와의 교류가 없는 닫힌 계 안에서의 이야깁니다만.

정리하자면 물질의 상태 변화, 작용-반작용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이 세 가지가 얽혀 그 작은 스티로폼 판자를 근사한 증기선으로 변화시켰죠.이게 10년 전 내주신 문제에 대한 제 답입니다. 아마도 정답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답을 찾을 때까지 크면 다시 연락하라. 선장님의 지령 아닌 지령이었습니다. 그리고 전 답을 드렸구요. 그러니

줄줄 이어져 나가던 펜의 움직임이 다시 멈췄다. 종이 끝을 구기던 소년의 손끝도 함께 멈췄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소년은 입술만으로 작게 욕설을 내뱉고는 다시 새 종이를 들었다. 이번 펜의 움직임은 아까보다 더 격하고 강했다.

당신은 나에게 장난감 증기선 하나만 던져놓고 도망가 버렸지만, 그런 걸 용서 못할 정도로 쪼잔한 인간은 아니다. 솔직히 당신이 가버린 뒤 엉망진창이 된 이 땅을 다스리고 정리하는 데만 해도 정신이 벅찼기 때문에 개인의 감정까지 일일이 떠올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지. 게다가 난 너무 어렸었거든.

그래, 생각해 봐. 사람을 거뒀으면 적어도 그 놈 정신머리가 클 때까지는 좀 보살펴 줘야 할 것 아냐. 10살짜리 애가 뭘 알겠냐고. 외모고 키고 딱 거기서 성장이 멈춰버린 애라면 더더욱 말이지. 집에서 잘 자던 애를 멋대로 납치한 것까지는 넘어갈게. 나도 여기 와서 나름대로 즐겁게 살았고, 나쁘지는 않았다고 생각해. 젖 달라고 빽빽거리는 소리가 커뮤니케이션의 전부인 꼬맹이의 미래가 보였다는 둥, 영원히 어린애로 남고 싶은 마음을 읽었다는 둥 그딴 헛소리는 별개로 둘게. 키우는 둥 마는 둥, 제대로 가르친 것도 없는 상태에서 내버려두는 건 또 무슨 짓이야. 그것도 난데없이 적으로 돌변해서!

솔직히 말해 봐. 그냥 버거웠다고. 무슨 중성미자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빅뱅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는 그런 거창한 문제면 또 모르겠어. 책 좀 뒤지면 바로 나올 간단한 물리 현상을 마치 어딘가의 난제인양 거창하게 던져놓고 ‘다 풀면 또 만날 수 있을 게다’? 장난해? 딱 봐도 애 돌보기 귀찮고 힘들어서 튄 거잖아. 말없이 야반도주하면 더 원망할까 걱정됐어? 차라리 그게 낫겠네. 그럼 그 원망하는 마음만으로 20년은 더 살아. 독하게, 이 악 물고. 당신처럼 애매하게 데려다 놓고 고고한 척 발 빼는 짓보다는 100배, 1000배 낫다고.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서 해적이 돼 분탕질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모르겠지만, 심심하면 시비 걸고 여기 애들 잡아 가는 걸로도 모자라 잠깐 친구 삼은 외부 애까지 괴롭히는 이유도 모르겠지만 (아 혹시 납치 협의 뒤집어쓸까봐 붙여보는데, 걘 며칠 있다가 집에 다시 보낼 작정이었어! 나 같이 중간에서 어정쩡하게 멈춘 불쌍한 인생 또 만들어서 뭐 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한테 상처 하나 입히지 않고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 일부러 져주는 이유 또한 모르겠지만…. 10년 동안 밖에서 싸돌아다닌 당신 따위 정말 버리고 살고 싶지만….

어쨌든 나는 답을 찾았어. 답을 찾으면 다시 만날 수 있다고 했지? 이번에는 제대로 만나서 내 답을 알려 줄게. 10년 분 쌓인 과한 애정 표현도 함께. 그러니 만나자고. 다툼도, 싸움도, 전쟁도 아닌 제대로 된 만남 좀 갖자고. 아직도 버거워한다면 한 마디만 더 말해 줄게. 에너지는 변해. 그렇다면 당신도 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게 10년간 변하지 않았던 유일한 믿….

티틱. 종이 끝에 펜이 걸렸다. 그게 신호인 듯 갑자기 멈춘 소년이 잠깐 어깨를 떨었다. 자신이 쓴 글을 다시 읽어 본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과 함께 조용히 종이를 구겨 던졌다. 마지막으로 한 장 남은 새 종이 위에 짧은 글귀만 휘갈긴 소년은 펜을 집어 던지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문제도 풀었고 마음도 풀었다. 덧붙여 팬티도 늘려 놨다.
망할 후크 선생은 악당 흉내 그만 내고 집으로 돌아올 것. 어서!





글 : 김은영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KISTI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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