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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희생 끝에 탄생한 ‘미터법’ 목록

조회 : 1188 | 2012-12-12

1999년 9월, 화성 궤도에 진입하던 미국의 ‘화성 기후 궤도선(Mars Climate Orbiter)’이 대기와 마찰을 일으켜 파괴됐다. 이 탐사선을 제작했던 미국 기업 록히드 마틴은 야드파운드법을 기준으로 제작했는데, 탐사선을 실제로 운용한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계기에 표시된 숫자들을 미터법 단위로 이해해 조종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추진력 수치를 잘못 계산하는 바람에 탐사선은 화성에서 예정보다 100km 아래인 60km 지점의 낮은 궤도에 진입하다가 사고가 발생했다.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지대에서는 과속으로 인한 사고가 빈번히 발생한다. 미국의 속도 단위는 마일(mil)이고 캐나다의 속도 단위는 킬로미터(km)로 다른데, 국경을 넘어서면서 단위 변화를 무심코 과속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하는 단위들. 그런데 국가별로 다르게 사용되는 단위들로 인해 자칫 큰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단위의 통일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중 길이를 재는 단위, 미터(meter)는 현재 미국, 미얀마, 라이베리아를 제외한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미터법이 제정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미터법은 1799년 12월 10일, 프랑스에서 도입됐다. ‘미터’라는 용어의 어원은 ‘잰다’는 의미의 그리스어인 메트론(metron) 혹은 라틴어 메트룸(metrum)에서 유래됐다. 18세기 말 프랑스는 자유, 평등, 박애를 부르짖는 시민 혁명이 한창이었다. 혁명을 이끌어낸 계몽사상가들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척도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실제로 그 당시 프랑스에는 약 800개의 이름으로 25만개나 되는 도량단위가 쓰이고 있었다. 이를 통일하려는 시도는 ‘혁명’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측정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었고, 여러 측정 장치들이 개발되고 끊임없이 개선되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다양한 양들에 대해 정밀한 측정을 시도했다. 과학이 정성적 단계에서 정량적 단계로 발돋움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당시 유럽 과학의 중심지였던 파리 과학아카데미에서 주도했다. 과학아카데미 회원들은 과학사의 잠재력을 국가를 위해 유익하게 쓸 수 있는 예로써 도량형의 개혁을 주장했다.

과학아카데미의 회원들이 공통적으로 요구했던 새로운 도량형 체계는 임의적이지 않고 표준 원기(原器)를 잃어버리더라도 쉽게 재생이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단순해서 사용하기 편리하며 합리성, 보편성을 갖춰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10진법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프랑스과학아카데미는 최종적으로 ‘북극에서 적도까지 지구 자오선(子午線) 길이(90도)의 1,000만분의 1을 새로운 단위 미터로 한다’고 공표했다. 이 결정에 따라 프랑스과학아카데미가 선발한 최고의 천문학자였던 장바티스트조제프 들랑브르(Jean-Baptiste-Joseph Delambre, 1749∼1822)와 피에르프랑수아앙드레 메솅(Pierre-Francois-Andre Mechain, 1744∼1804)은 측량원정을 떠났다. 이들은 정확한 자오선 길이의 측정을 위해 1792년 6월 각각 파리의 북쪽과 남쪽으로 떠난다. 정치적 대변혁기에 이뤄진 그들의 측량원정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그림 북극에서 적도까지 정확한 자오선의 길이를 측정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던 천문학자들. 좌측이 들랑브르, 우측이 메솅. 사진 출처 : 위키미디어

들랑브르는 싣고 가던 관측기구들이 고성능 무기로 오인돼 민병대로부터 몰수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넉 달간 겨우 64km 밖에 전진하지 못할 정도의 악천후를 만나기도 했다. 남쪽 원정대장 메솅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가 넘어야 했던 피레네 산맥은 사람을 공격하는 늑대는 물론 총기를 불법으로 거래하는 밀수업자, 산적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또 바르셀로나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늑골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또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전쟁이 터지면서 남쪽 원정대는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원정대원들이 파리로 돌아오고 나서도 정확한 수치를 가져오는 데는 7년이나 걸렸다. 그 이유는 메솅이 숨진 뒤 들랑브르가 그의 측량노트를 검토하면서 밝혀졌다. 메솅은 자신의 데이터를 더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자오선 측량작업을 조작했던 것이다. 그는 결벽에 가까울 만큼 정확성을 중요시했다. 그런데 측량노트를 작성하면서 오류를 발견한 것이다. 귀국 후 프랑스 최고 천문가로 대접받은 메솅이지만, 자신의 실수로 인해 자살을 시도할 만큼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결국 1m가 탄생했다. 프랑스는 1799년 6월 미터법을 국가 표준으로 할 것을 법령으로 공포했다. 하지만 미터법은 보급되기까지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프랑스에서는 1840년 강제로 법령을 집행하기에 이른다. 이후 1870년 8월에는 파리에서 국제 미터법 위원회가 발족됐고 1875년 5월 20개국 참가국 중 17개국이 미터 협약에 서명했다. 몇 차례의 수정을 거쳤지만 이제 미터법은 미국 등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사용하는 ‘만물의 척도’로 자리 잡았다.

글 : 유기현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KISTI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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