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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는 수학자 겸 천문학자였다!? 목록

조회 : 1019 | 2013-02-20

이 세상에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것이 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물건은 안과 밖 또는 겉과 속을 구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클라인병(Klein bottle)이 있다. 이 병은 독일의 수학자 클라인(Christian Felix Klein)의 이름을 딴 것으로, 원통 표면의 두 끝을 반대방향으로 결합해 얻을 수 있다. 이 병은 표면을 3차원의 유클리드 공간에 작도할 수 없으며 겉과 속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클라인병의 구조. 아래는 세로로 잘랐을 때의 구조


이 병을 정확하게 세로로 반을 자르면 2개의 뫼비우스 띠(Möbius strip)가 된다. 즉, 클라인병과 뫼비우스 띠는 수학적으로 유사한 성질을 갖고 있는데, 뫼비우스 띠의 성질을 공간으로 확장한 것이 클라인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겉과 속의 구별이 없는 것에 대해 알아보려면 먼저 뫼비우스 띠를 알아야 한다.

뫼비우스 띠는 수학의 기하학과 물리학의 역학이 관련된 곡면으로, 경계가 하나밖에 없는 2차원 도형
이다. 이 띠는 1858년에 독일의 수학자 뫼비우스(August Ferdinand Möbius, 1790년~1868년)와 요한 베네딕트 리스팅(Johann Benedict Listing)이 서로 독립적으로 발견했다. 이 띠를 발견한 뫼비우스는 대중적인 천문학 논문인 <핼리혜성과 천문학의 원리>뿐만 아니라 정역학, 천체역학과 다양한 많은 수학적 논문을 발표한 천문학교수였다. 하지만 오늘날 그는 뫼비우스의 띠로 더 유명하고, 그가 천문학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뫼비우스는 1790년 11월 17일에 태어났으므로 2010년 11월 17일은 뫼비우스가 탄생한지 꼭 220년이 된다. 그는 독일 작센의 슐포르타에서 태어나 1809년에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1년도 지나지 않아 수학, 천문학,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꾸게 된다.

그는 괴팅겐 대학에서 1813~1814년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로부터 천문학을 배웠고, 할레 대학에서는 가우스의 스승인 파프(Johann Friedrich Pfaff)로부터 수학을 배웠다. 그는 1815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인 <행성들의 엄폐 계산에 대하여(De Computandis Occultationibus Fixarum per Planetas)>를 발표하며 이론천문학자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그 해부터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무급강사를 하게 된다. 그는 이외에도 순수천문학에 관한 <천문학 법칙(Die Hauptsätze der Astronomie)>, <천체역학 원리(Die Elemente der Mechanik des Himmels)> 등 천문학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당시 뫼비우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수학과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독일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몰바이데(Karl Brandan Mollweide)였다. 몰바이데는 처음에 라이프치히 대학의 천문학 교수였다가 1816년에 수학과로 자리를 옮겼고, 뫼비우스가 그 뒤를 이어 천문학 및 고등 역학 조교수가 됐다.


뫼비우스는 2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라이프치히 대학의 천문학 및 고등 역학 조교수직을 얻었지만 오랫동안 정교수로 승진하지 못했다. 아마도 학생을 가르치는 재주는 신통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학생들은 대학에서 교수의 강의를 선택해 수업료를 내고 강의를 들었다. 급료 역시 강의를 듣는 학생 수에 비례해 지불됐는데, 뫼비우스의 수업을 들으려는 학생은 많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고 무료강좌까지 열어 학생들을 유치해야 했다.

1825년 몰바이데가 죽자, 뫼비우스는 그의 자리를 물려받아 수학과 교수로 옮겨가고 싶었지만 좌절된다. 그 이후 연구에 더욱 정진한 뫼비우스가 연구가로서 점점 명성을 얻게 되자 1844년 예나(Jena) 대학에서 그를 초빙하려고 했다. 그러자 라이프치히 대학은 그때까지 조교수로 남아있던 그를 28년 만에 정교수로 승진시키며 남아주길 바랐다. 뫼비우스는 1846년 작센 왕립 과학회의 공동 창립자로 학회를 설립했고 1848년부터 1861년까지 라이프치히에 있는 천문대 대장을 역임했다.

수학에 관한 그의 논문은 대부분 기하학에 관한 것으로, 주로 독일의 수학 전문 학술지 <크렐레(Crelles Journal)>에 실렸다. 그의 논문 대부분은 1827년 발표한 논문인 <중력중심의 계산(Der barycen-trische Calkul)>에서 주장했던 방법을 응용·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기하학적 변환과 동차좌표계(homogeneous coordinate)에 관한 내용과 오늘날 ‘뫼비우스 넷(Möbius net)’이라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기하학을 소개해 기하학의 새로운 발전을 이끌었다. 1837년에 발표한 <정역학(靜力學) 편람(Lehrbuch der Statik)>에서 정역학을 기하학으로 다뤄 점과 면의 영계(零系, null system)와 공간의 선체계(線體系, systems of lines)를 이끌어내며 위상수학의 선구자가 됐다.

오늘날 그의 이름이 붙은 것으로 뫼비우스 함수, 뫼비우스 변환, 뫼비우스의 띠 등이 있다. 그 가운데 뫼비우스의 띠는 1858년에 발견했고, 이에 관한 논문을 프랑스 과학원에 제출했지만 논문은 그가 죽은 뒤에야 출판됐다.

그렇다면 뫼비우스는 뫼비우스의 띠를 어떻게 발견하게 됐을까? 이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뫼비우스가 해변으로 휴가를 떠났을 때의 일이었다. 밤이 되자 그의 숙소에는 많은 수의 파리가 날아들었다. 그는 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양면에 접착제를 바른 띠를 구해왔다. 이 띠를 반 바퀴 돌려 띠의 양 끝을 서로 연결한 뒤에 묵고 있던 방의 기둥에 걸어 놓았다. 이 띠는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그날 밤 그는 파리의 방해 없이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뫼비우스는 파리가 잔뜩 붙어 있는 띠를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띠는 단 한 개의 면과 단 한 개의 모서리를 갖고 있었고,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오늘날의 뫼비우스 띠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이다.

뫼비우스의 띠를 만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종이를 잘라 띠를 만든 후 그 띠를 한 번 꼬아서 붙이면 다음 그림과 같이 모서리 AD의 화살표와 모서리 CB의 화살표가 같은 방향으로 가는 하나의 화살표가 된다. 즉 꼭짓점 A는 꼭짓점 C, 꼭짓점 D는 꼭짓점 B와 일치하게 된다.



뫼비우스 띠를 만든 다음 그 띠의 가운데를 따라 자르면 네 번 꼬인 하나의 띠가 된다. 이것은 뫼비우스 띠가 위에서 본 것과 같이 경계가 하나뿐이기 때문이고, 자르면 두 번째 경계가 생겨나는 것이다.



뫼비우스 띠는 원상태로 돌아가 힘의 평형 상태를 유지하는 독특한 형태의 꼬인 부분이 있다. 직선이 운동할 때 생기는 곡면인 ‘가전면(可展面, developable surface)’이라고 하는 부분이 뫼비우스 띠의 모습을 예측하는 핵심이다. 이와 관련된 연구가 1930년에 처음 있었으나 그 규칙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77년이 지난 2007년 영국의 과학자들이 뫼비우스 띠를 만들 때 직사각형 모양 띠의 가로와 세로의 길이 비율에 따라 가전면과 띠의 에너지 밀도가 달라지며, 띠의 모양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뫼비우스 띠를 역학적으로 연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에너지 밀도는 띠를 접었을 때 재질 전체에 생기는 탄력에너지로, 접힘이 심한 곳에서 가장 높고 평평하게 펴진 곳에서 가장 낮게 나타난다고 한다. 결국 연구팀은 자연계에서 뫼비우스 띠가 실제로 나타나는 모양의 비밀을 수학으로 풀어낸 것이다. 그리고 이 결과는 뫼비우스 띠처럼 꼬인 물체의 잘 찢기는 부분을 예측하거나 화학, 양자물리학과 나노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새로운 약이나 구조를 만드는 분야에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다.

글 : 이광연 한서대 수학과 교수

출처 : KISTI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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