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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과학자들 목록

조회 : 878 | 2013-07-03

아이작 뉴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토마스 에디슨 이 세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각각 다른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고 사람들이 놀랄만한 발명품을 개발한 것과 같은 공통점 외 다른 공통점을 찾아 본다면 이들은 살아생전 위대한 과학업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으며 그 업적을 인정 받았다는 것일 것이다그러나이런 행복한 과학자들이 있는 반면 위대한 과학적 발견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우한 인생을 산 과학자들도 많다. 오늘 칼럼에서 소개할 1명의 공학자와 2명의 과학자가 바로 그것이다.업적을 남긴 과학자도 드물다. 애석하게도 전쟁이 한 위대한 과학자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한 것이다.



인류는과학과 함께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그 문명 속에는 위대한 과학자들의 눈부신 업적이 있는 반면 우리가 잘 알지 못했지만 위대한 과학자 못지 않은 발견을 한 이름없는 과학자들도 많았다. 지금도 우리나라에는 일년 내내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에 인생을 걸고 연구하시는 과학자들이 많다. 지금도 묵묵히 실험실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우리 과학자들에게 격려의 마음을 전하는 것은 어떨까? (글:김형자-과학칼럼리스트)나일론의 발명자캐러더스

1938년 9월 21일, 미국의 유명한 화학회사 뒤퐁은 ‘나일론’이라는 새로운 섬유 발명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신문들은 ‘석탄과 공기와 물로 만든 섬유’, ‘거미줄보다도 가늘고 강철보다 질긴 기적의 실’이라면서 대서특필하였고, 이 소식에 세계 각국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제품을 하루 빨리 보고 싶다는 사람들의 열망으로 나일론 견본은 여러 나라로 보내졌고, 각국의 과학자들은 인공섬유 나일론을 분석한 후 그 특성에 감탄했으며, 관련업자들은 발 빠르게 나일론 제품의 판매를 서두른 결과 나일론은 전세계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1940년 5월, 뉴욕에서 여성용 나일론 스타킹의 판매가 시작되자 많은 여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값싸고 질 좋은 나일론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만했다.



그러나 정작 이 제품의 개발자 ‘캐러더스(Wallace H. Carothers; 1896-1937)’는 자신의 발명품이 날개 돋치듯 성황을 이루는 행복한 장면을 볼 수 없었고, 그로 인한 부와 명성도 누리지 못했다. 캐러더스는 뒤퐁사가 나일론의 발명을 발표하기 전해인 1937년 4월, 필라델피아의 한 호텔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살을 했다. 캐러더스가 성공을 거두고서도 왜 자살을 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나일론의 상품화 과정에서 주도권을 빼앗긴 것이 한 원인이었다는 설도 있고, 러시아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매우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고도 한다. 그는 자신의 발명품이 세상에서 큰 빛을 발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41세의 아까운 나이로 스스로 삶을 마쳤다.



산소의 존재를발견한 라부아지에

산소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발견한 근대 화학의 아버지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Lavoisier; 1743-1794)’. 이공계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그의 이름 정도는 기억할 것이다. 고등법원 검사의 아들로 태어나 법학을 전공했지만 곧바로 과학 연구에 열중하여 기초과학의 근간이 되는 ’질량보존의 법칙’을 확립하는 등 무수한 업적을 남겼다.



라부아지에는25세 때부터 세금 징수관을 겸했다. 당시 인구 2,500만 명의 프랑스에는 징세 청부인이 3만 명이나 있었는데 간접세를 거두어 일정금액만 정부에 납입하면 나머지는 수입이었다. 그는 자신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징세로부터 얻은 수입은 모두 화학실험에 썼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세금 징수관들이 부패의 온상으로 몰리면서 결국 51세의 나이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사형 당하기 전, 재판장에게 “중요한 실험을 할 수 있도록 2주일만 재판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재판장은 “프랑스 공화국은 그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로 사형에 처했다. 과학자도 사회의 한 구성원이므로 순수하게 연구만 수행했다는 주장으로 사회적 책임이 면제될 수는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만일 죽음보다 연구를 더 소중히 여긴 라부아지에게 실험할 수 있는 2주일의 시간을 더 주었더라면 그 실험은 어쩌면 역사에 남을 훌륭한 연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애석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원소주기율표를완성한 모즐리

노벨상을 눈앞에 두고 죽음을 맞이하는 비운의 과학자들도 종종 있다.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어도 노벨상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수여되기 때문이다. 모즐리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1913년, 물리학자 ‘모즐리(Henry Gwyn Jeffreys Moseley; 1888-1915)’는 금속 원소의 특성 X선 스펙트럼을 실험적으로 연구하여 그 파장과 원자번호 사이에 간단한 관계(파장의 제곱근이 원자번호에 반비례)가 성립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에 의해 특성 X선의 파장을 측정하면 바로 그 물질의 원자번호가 결정되게 되는 셈으로 주기율표를 완성시키는 데 큰 무기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 원자 번호가 작은 것부터 순서대로 원소를 배열한 결과 멘델레예프의 원소주기율표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물론 러시아의 멘델레예프가 근대적인 주기율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하지만 지금 사용하고 있는 주기율표는 모즐리의 주기율표이다.



그러나 원자번호의 발견이라는 큰 업적을 이룬 모즐리는 노벨상과의 인연을 맺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자진 영국 공병대에 지원하여 전쟁에 참가한 모즐리가 불과 27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업적의 노벨상은 1924년 시그반에게 돌아갔다. 시그반이 노벨상을 수상한 이유는 모즐리가 하다 남긴 원소를 모즐리보다 정확하게 측정했다는 것이었다. 아마 모즐리가 죽지 않고 2년만 더 살았다면 1917년의 노벨상은 모즐리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모즐리가연구에 힘쓴 것은 놀랍게도 23-26세까지의 고작 3년이다. 그렇게 짧은 기간에 그만한 업적을 남긴 과학자도 드물다. 애석하게도 전쟁이 한 위대한 과학자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한 것이다.

인류는 과학과 함께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그 문명 속에는 위대한 과학자들의 눈부신 업적이 있는 반면 우리가 잘 알지 못했지만 위대한 과학자 못지 않은 발견을 한 이름없는 과학자들도 많았다. 지금도 우리나라에는 일년 내내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에 인생을 걸고 연구하시는 과학자들이 많다. 지금도 묵묵히 실험실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우리 과학자들에게 격려의 마음을 전하는 것은 어떨까?

 

글:김형자-과학칼럼리스트
출처 : KSITI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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