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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세상을 구한 나이팅게일


|글 | 김종립 기자│이미지출처 위키미디어


나라를 운영할 사람들은 통계활용법을 배워야 한다. 이 말을 남긴 사람은 누굴까. 통계학자일까. 아니다. 우리에게 백의의 천사로 알려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남긴 말이다. 나이팅게일은 나라를 바르게 운영하려면 통계를 잘 이용해야한다고 믿었다. 사랑과 희생으로 전쟁터를 누비며 죽음의 문턱에서 병사를 구한 여성으로만 알았던 나이팅게일의 과학자적인 면모를 살펴보자.











[나이팅게일이 자신의 열병 치료를 마치고 간호를 하기 위해 크림반도의 스쿠타리 야전병원으로 돌아온 모습을 그린 그림. 제리 바렛이 1856년에 그렸다. 영국 런던에 있는 나이팅게일의 동상. 나이팅게일은 등불을 들고 헌신적으로 병사를 돌봤다.]









[나이팅게일 집안의 소유였던 집. 나이팅게일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당시 천하고 힘든 직업이었던 간호사가 됐다. 결국 그녀는 간호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꿨다.]



'보라, 저기 허술한 집에서 어두운 방에서 방으로 램프를 든 젊은 여인이 천사와 같이 지나는 것을. 병사들은 구원의 꿈을 보는 듯 어스름한 벽에 비치는 그 그림자에 입을 맞춘다.’



이 시는 미국의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가 나이팅게일에게 바친 시 ‘산타 필로멜라’의 일부다. 나이팅게일의 이미지는 롱펠로가 읊은 것처럼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한 병사를 밤새 보살핀 ‘백의의 천사’다.



그렇지만 나이팅게일은 영국 군대와 도시의 위생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통계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미국의 과학사학자 버나드 코헨은 나이팅게일이 통계를 이용해 19세기 영국의 군대 및 공공보건과 사회개혁에 기여했으며, 통계 정보를 한눈에 들어오게 시각화하는 방법을 개선했다고 평가했다.



나이팅게일은 왜 통계에 주목했으며, 통계를 이용해 어떤 활동을 했을까. 어떻게 과학자도 아닌 그녀가 통계를 활용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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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를 사랑한 나이팅게일


나이팅게일은 1820년 영국의 부유한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여성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흔치 않은 생각이었다. 덕분에 나이팅게일은 아버지로부터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웠으며, 역사와 철학을 배웠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숫자로 각종 정보를 정리하는 일을 즐겼다. 가족과 함께 유럽을 여행할 때 매일 여행한 거리를 계산하고, 출발하고 도착한 시간을 기록했다. 여행한 지방의 법률과 토지관리체계, 사회상황과 복지기관들을 관찰해 통계를 냈다. 수에 관심이 많던 나이팅게일은 스무 살이 되던 해, 개인 수학 교사를 두고 수학을 정식으로 배워 전문적 통계 정리의 기초를 닦았다.



유럽과 이집트 등지를 여행하며 나이팅게일은 여러 병원을 둘러봤다. 낡은 간호체계의 실상을 목격한 뒤 간호의 중요성을 느껴 간호사가 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그녀의 가족들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여성의 사회활동을 긍정적으로 보던 아버지조차 반대할 정도였다. 당시 간호사는 천한 사람이 하는 고된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나이팅게일은 가족의 반대에도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영국에는 간호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독일의 병원 겸 고아원 ‘카이저베르트’까지 가서 간호교육을 받았다. 1853년 나이팅게일은 런던에 있는 여성 간호소의 감독관으로 임명됐고, 그곳의 간호 여건을 크게 향상시켜 명성을 얻었다.




통계로 부상병을 구하다


1854년 러시아와 연합국간에 ‘ 크림전쟁 ’이 일어났다. 많은 영국 군인이 부상과 질병으로 죽었다. 영국의 국방장관 시드니 허버트는 나이팅게일에게 크림 반도의 야전병원으로 가 간호활동을 해줄 것을 부탁했다. 나이팅게일이 가기전 야전병원에서는 부상병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벌레가 들끓을 정도로 불결했으며, 붕대와 환자복 같은 기본 비품도 부족했다.



나이팅게일은 야전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병동을 청소하고 부상병의 옷을 빨았다. 뜨거운 물을 공급해 병사들이 깨끗이 씻을 수 있게 만들었다. 당시는 세균이 질병의 원인이라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이팅게일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질병은 더럽고 바람이 통하지 않는 병실이나 방에서 자연스럽게 생긴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이팅게일은 좋은 간호를 하기 위해선 우선 환경을 청결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부터 나이팅게일의 통계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이팅게일은 야전병원의 위생을 개선하기 위해 숫자로 야전병원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가 통계를 내기 전까진 아무도 크림전쟁에서 죽은 영국군의 수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통계를 작성하기 위한 통일된 기준조차 없었다. 세 가지 기록체계가 있었는데, 기준이 각기 다르다 보니 결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나이팅게일은 먼저 통계 작성기준을 세워 기록체계를 통일했다. 기준에 따라 입원, 부상, 질병, 사망 등의 내역을 매일 상세히 작성했다. 이 기록을 토대로 영국 정부에 크림전쟁의 상황을 전하고 야전병원의 위생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나이팅게일의 보고서를 본 영국정부는 야전병원의 위생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화장실과 오수구덩이를 청소하고 환기구를 설치했으며, 필요한 비품을 공급했다.



개선사업을 시작한지 한 달이 지나자 야전병원의 사망률이 급격히 떨어졌다. 42%에 달하던 환자의 사망률이 2%까지 떨어졌다. 당시 사람들은 질병의 원인이 무엇이며, 깨끗해지면 왜 사망자가 줄어드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이 제시한 통계는 깨끗한 위생이 사람을 살린다는 증거가 돼 수많은 사람들을 설득했다.









[승선을 기다리는 영국군 부상병들. 윌리엄 심슨이 그렸다. 나이팅게일이 오기 전 크림전쟁에서 부상을 당한 병사들은 위생이 열악하고 물품이 부족해 큰 고통을 받았다.]









[용어설명 - 크림전쟁1854년 3월부터 1856년 3월까지 지속된 러시아 제국과 연합국 사이의 전쟁. 연합국에는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 왕국, 오스만 제국이 참가했다. 전쟁의 대부분이 흑해에 있는 크림 반도(색칠한 부분)에서 일어났기에 크림전쟁이라 불린다.]



 


알기 쉬운 도표로 어려운 통계를 설명하다


나이팅게일은 복잡한 숫자들이 나열된 통계를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통계를 이해하기 쉽게 그림(도표)으로 보여줬다. 나이팅게일의 장미 도표(Rose diagram, coxcomb)는 위생 개선 사업의 극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이 도표는 프랑스의 토목공학자 찰스 미나가 그린 도표와 함께 19세기 최고의 통계그래픽으로 손꼽힌다.



크림전쟁의 사망원인에 따른 월별 사망자를 표현하기 위해 나이팅게일은 원을 12개의 쐐기로 나눴다. 원의 중심에서부터 세 개가 겹쳐진 모양으로 그려진 쐐기의 넓이는 월별 사망자 수를 나타낸다. 각각의 색이 다른 쐐기는 서로 다른 사망원인을 표현한다. 오른쪽 도표가 1854년 4월부터 1855년 3월까지의 사망자 수이고, 왼쪽의 도표가 1855년 4월부터 1856년 3월까지의 사망자 수이다. 파란색 쐐기는 질병으로 죽은 사람이고, 빨간색 쐐기는 부상으로 죽은 사람이다. 검은색 쐐기는 기타 이유로 죽은 사람을 뜻한다. 오른쪽 그림을 보면 대체로 파란색 쐐기가 크지만 왼쪽의 그림을 보면 파란색 쐐기의 크기가 많이 줄어들었다. 나이팅게일은 이 도표를 통해 군 병원의 위생상태가 개선되면서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는 것을 보여줬다.



나이팅게일의 도표는 영국의 통계학자 윌리엄 파르의 도표를 개선한 것이다. 파르는 나이팅게일과 비슷한 자료를 갖고 월별 사망원인을 분석한 도표를 그렸는데, 월별 사망자 수를 넓이가 아닌 원의 반지름 위에 길이로 나타내고 그 점을 연결했다. 이 도표를 보는 사람들은 선의 길이가 아닌 면적이 사망자 수를 뜻한다고 착각한다. 결과적으로 월별 사망자 수의 차이를 과장하게 된다. 나이팅게일은 파르의 도표가 갖는 문제점을 간파해 선의 길이가 아닌 쐐기의 면적으로 사망자 수를 나타낸 새로운 그림을 그린 것이다.




통계와 도표로 영국을 개선하다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이 끝나자 영국으로 돌아왔다. 나이팅게일은 전쟁터뿐만 아니라 영국 본토도 열악한 위생으로 질병이 만연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녀는 크림전쟁 중 영국에서 조성된 ‘나이팅게일 기금’으로 1859년 런던의 세인트토머스 병원에 ‘나이팅게일 간호학교’를 설립했고, 같은 해 ‘간호론’이라는 책을 써 간호학의 기초를 세웠다.













[1. 나이팅게일이 기금을 모아 세운 나이팅게일 간호학교의 모습. 런던에 있는 성 토머스 병원에 설립됐다. 현재는 런던 킹스칼리지에 소속돼 있다.

2. 전쟁이 없던 시기에도 군대의 사망률은 민간 사망률보다 두 배나 높았다. 나이팅게일은 통계와 도표로 이런 사실을 알렸다.

3. 나이팅게일이 쓴 ‘간호론’에는 질병의 치유와 예방을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정리돼 있다.]



그녀는 영국 사회를 바꾸기 위해 통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전쟁이 없는 시기에도 영국 병영 내 사망률이 민간의 사망률보다 두 배 가까이 높은 것을 보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크림 반도의 경험과 통계를 근거로 삼아 병영의 위생을 개선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1860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세계통계대회에서 나이팅게일은 병원 기록 양식을 통일하자는 제안을 내놨다. 당시 영국 병원의 기록양식은 서로 달랐다. 병을 분류하고 기록하는 양식이 제각기 달라서 기록을 모아도 쓸모가 없었다. 따라서 어떤 정책을 실행해도 실제 효과가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나이팅게일은 병원 기록 양식이 통일되면 쓸모 있는 통계 자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당시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에 주둔했던 영국군의 위생을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다. 인도의 모든 영국군대에 설문지를 보낸 뒤, 결과를 분석해 2000여 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만들었다. 이 보고서에는 인도 주둔 군대의 사망률이 1000명 당 69명에 달한다는 사실과 사망률이 이처럼 높은 이유가 불결한 위생 때문이라는 내용이 수치로 기록돼 있었다. 나이팅게일은 보고서에 근거해 위생을 개선할 것을 요구했다. 개선 작업이 이뤄지고 10년이 지난 뒤 사망률은 1000명 당 18명으로 줄었다.



이렇게 통계를 통해 세상을 바꾼 공로를 인정받아 나이팅게일은 영국통계학회의 첫 번째 여성 회원이자, 미국 통계학회의 명예회원이 됐다.



나이팅게일은 통계를 잘 사용하면 인류의 생활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는 ‘법률과 정부의 부적절함, 정치 체계의 무능함, 사회를 이끄는 자들의 답답한 몽매함’을 오직 통계 연구로만 바르게 이끌 수 있다고 여겼다. 이를 위해선 모든 사람들이 통계 법칙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현애 서울대 간호대 부학장은 나이팅게일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나이팅게일은 통계자료를 표나 그래프로 나타내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를 바꿨습니다. 즉 통계를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데만 활용한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을 수정하는 처방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나이팅게일의 업적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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