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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와 광기가 만든 마법사

무기·복제·인공지능이 단골 메뉴
흰색 가운을 입고 있는 40대 중반의 남성. 헝크러진 머리에 두꺼운 안경을 썼다. 플라스크 안에선 정체 불명의 녹색 액체가 끓고 있다. 비밀스러운 음모가 진행중이다. 그는 바로 ‘미치광이 과학자’(mad scientist)다. 미치광이 과학자는 영화라는 장르의 탄생과 함께 수많은 SF 호러물에 단골 소재로 사용돼 왔다.

예로부터 사람을 놀리는 도깨비 불과 도마뱀 혓바닥, 염소의 피를 섞어 신비의 물약을 만들어내는 마법사 얘기는 자주 등장했다. 뻔한 일상보다는 신비로운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혁명과 함께 과학만능시대가 도래하자 마법사들은 자신의 지위를 과학자에게 넘겨줬다. 그러나 변한 건 없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마법이나 과학은 모두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지는 보이지 않는 어둠처럼 무시무시한 괴물을 잉태했다. 바로 미치광이 과학자의 이야기다. 








권력과의 공생에서 자본의 시녀로
누더기를 기운 듯 봉합된 시체의 온 몸에는 액체가 공급되는 튜브와 전선이 연결돼 있다. 폭풍이 쏟아지는 밤, 언덕 위 낡은 성은 삐걱거리며 비명을 지른다. 번개가 성탑의 꼭대기를 때리면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피조물은 잃었던 생명을 되찾고 눈을 뜬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한 장면이다.

초기 미치광이 과학자의 모습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마법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중에게 과학은 마법처럼 신비와 비밀로 가득찬 애매모호한 학문이었다. 영화 속의 이런 과학자들은 사람의 눈을 피해 실험을 진행할 수 있는 거대한 성과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연구 주제는 죽은 사람을 살리거나 투명 인간 만들기, 시간 여행하기 등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사들이었다.


초기 미치광이 과학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는 ‘프랑켄슈타인’

하지만 미치광이 과학자의 모습은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두번의 세계대전, 특히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위력은 미치광이 과학자가 실제로 존재함을 보여줬다. 지하실에서 비밀스럽게 연구되던 과학은, 버섯구름과 함께 인구 수십만의 도시를 잿더미로 바꿔버렸다. 사람들은 과학자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깨닫게 됐고, 과학자의 위상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과학자들은 과학의 도움 없이는 국가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세계대전을 통해 보여줬고, 정부는 자신들의 지원 없이는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없다는 점을 과학자들에게 일깨워줬다. 과학과 권력의 공생관계가 탄생한 것이다.

고성의 지하실에 자리잡고 있던 음침한 실험실은 삼엄한 경계와 최첨단 시스템으로 무장한 정부의 비밀 기지로 이전됐고, 가내 수공업 수준이던 개인 연구는 수백명의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로 전환됐다. 이 시기에 전 세계를 파괴하고도 남을 비밀 병기들이 개발됐다.





1990년대 초, 옛소련이 붕괴되고 냉전이 끝나면서 미치광이 과학자들은 다국적 기업에 흡수됐다. 이제 그들의 연구 목표는 신성한 국방의 의무가 아닌 기업의 이윤이다. 기업의 이윤은 냉전의 논리보다 더 냉혹했다. 돈 되는 일 앞에 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고, 무엇이든 가리지 않았다.

‘쥬라기 공원’의 과학자들은 멸종된 공룡을 되살려 냈고, ‘여섯번째 날’의 과학자들은 부상당해 쓸모 없어진 풋볼 선수를 폐기물처럼 살해한 뒤 다시 만들어 내는가 하면 회사라는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사고로 죽은 회장을 몇번씩 되살려낸다. ‘에어리언’ 시리즈의 과학자들은 우주괴물을 생체병기로 개발하기 위해 승무원들을 희생시킨 것도 모자라 죽은 리플리를 되살려 냈다.






삐뚤어진 호기심이 탄생시킨 녹색 괴물
미치광이 과학자는 크게 다섯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그 첫번째는 창조자형이다.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부류로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후예들이다. 그들의 목표는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것. 과거의 선배들은 시체를 되살리거나 온갖 약품을 이용해 생명체를 만들어내려 했다. 그러나 최근의 과학자들은 컴퓨터를 이용해 인공지능을 만들어내거나, 유전공학을 이용해 과거에 멸종된 생명을 되살린다. 공통점이 있다면 대부분 자신들이 만들어낸 피조물을 통제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다.


‘12 몽키즈'의 세균학자는 인간을 멸종시키기 위해 전세계에 치명적 바이러스를 퍼뜨린다.

두번째는 세계 정복형이다. 이들은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야심가 밑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극단적인 경우 이 유형의 미치광이 과학자는 세계 정복이 아닌 파괴를 꿈꾼다. ‘스파이더 맨’의 고블린은 변변찮은 자신의 능력과 비행체 하나를 갖고 세계를 정복할 야심을 키웠다. 영화 ‘12 몽키즈’의 세균학자는 지구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인간을 멸종시키기 위해 전세계에 바이러스를 살포했다.

세번째는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는 유형이다. ‘메멘토’에서 아내를 살해한 범인을 찾기 위해 온몸을 문신으로 도배하는 집념을 보여준 가이 피어스는 영화 ‘타임머신’에서 어이없이 죽어버린 애인을 되살리기 위해 시간여행 장치를 발명하고, 80만년 후의 미래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집념을 보여준다. ‘너티 프로세서’의 에디 머피는 자신이 개발한 비만 치료제를 개인적인 목적, 즉 연인에게 멋지게 보이려고 사용하며, ‘멀티 플리시티’에서는 개인의 시간을 즐기기 위해 만든 복제인간이 등장한다.





네번째는 실수형로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유형이다. ‘론머맨’의 엔젤로 박사는 가상현실을 연구하는 과학자다. 그는 옆집 잔디깎기 총각인 죠브의 정신지체를 치료하기 위해 자신의 가상현실 장치를 이용한다. 그러나 부작용으로 인해 죠브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돼버린다. ‘더 플라이’의 세스 박사는 순간이동 장치에 들어온 파리와 융합돼 서서히 파리 인간으로 변해간다. 그러나 그는 순간이동 장치 덕분에 자신의 몸이 건강해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렇듯 영화 속에 등장하는 많은 과학자는 자신의 연구 결과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은 과학자들이 흔히 갖고 있는 순수한 호기심이 변질되는 경우다. 최근 개봉된 영화 ‘헐크’에서 과학자인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치료하지 않았다. 자신의 피조물이 어떻게 성장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호기심은 비단 미치광이 과학자들뿐 아니라 정상적인 과학자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영화 ‘콘택트’에서 앨리 박사가 외계인의 신호에 인생을 바친 것은 ‘거기에 무엇이 있을까?’라는 호기심과 ‘무언가 있을 것이다’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영화 ‘스피어’에서 과학자들이 목숨을 걸고 심해로 내려간 이유는 둥근 알 모양의 물체가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 당시 사형을 선고받은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중요한 실험을 위해 단두대형을 2주 간만 연기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이 정도면 과학자들의 호기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오류 투성이의 복제 과학자
최근 SF 영화에 등장하는 미치광이 과학자의 관심은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첨단무기다.

지하 연구소를 탈출한 헐크가 사막의 모래산을 가로질러 도망치고 있을 때, 하늘을 가르며 몇발의 폭탄이 투하된다. 헐크를 향해 떨어지던 폭탄은 공중에서 ‘퍽’하는 소리와 함께 수백개의 작은 폭탄으로 분해돼 쏟아진다. 이라크전에서 심각한 문제로 제기됐던 ‘집속탄’(cluster bomb)이다.

집속탄은 축구장 여러개 넓이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살상할 수 있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집속탄이 터지는 장면을 보면서, 과학자들은 무슨 생각으로 저런 것을 만들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애인을 되살리겠다는 개인적 욕심에 타임머신을 개발해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 ‘타임머신’

하지만 어떤 과학자가 양심의 가책 때문에 무기개발을 포기한다 해도 또다른 과학자는 그것을 만들어낸다. 첨단무기 연구는 무한경쟁에 돌입했고 철저한 시장 원칙에 입각해 개발되고 있다. 첨단무기들이 갖고 있는 엄청난 파괴력과 그것이 가져올 치명적인 재앙을 알고 있지만 개발을 막을 수는 없다. 그저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첨단무기들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영화는 007 시리즈와 같은 첩보영화다. ‘언더 시즈 2’에서는 레이저를 발사해 목표물을 파괴하는 인공위성이 등장하며 ‘007 골든아이’에서는 도시의 모든 기능을 마비시키는 EMP 무기가 등장한다. 첨단무기들 대부분은 국가 비밀 기관에 의해 관리되고 있고 일반인들의 접근이 불가능하다. 첩보원과 국가기관 소속의 과학자들의 만남은 첩보 영화의 진부한 공식이 돼버렸다.





미치광이 과학자의 또다른 관심은 생명공학과 인간복제다. ‘멀티플리시티’ ‘저지 드레드’ ‘여섯번째 날’ 같은 영화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 나타나는 인간복제 기술은 현실의 기술과는 동떨어진 몇가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인간은 완성된 모습으로 복제되지 않는다. 하나의 수정란으로 시작된 복제 인간은 보통의 아이처럼 어머니의 자궁에서 열달을 자라야 하고, 성인이 되기 위해서 20여년 동안 성장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에서는 복제인간이 성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두번째는 복제인간의 기억이다. 영화 속의 복제인간은 대부분은 ‘원본’과 동일한 기억을 소유하고 있다. 성장효소를 사용해 빠른 시간 내에 성인으로 성장시킨다 하더라도 수십년 간 축적된 기억까지 복제할 수는 없다. 마지막은 가장 중요한 것인데, 복제인간은 나와 똑같은 사람이 아닌, 나를 닮은 사람에 불과하다. 일란성 쌍둥이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화 속의 복제인간의 모습과 기억마저 동일한 또다른 나로 등장하기 일쑤다.







과학자의 광기 이어받은 인공지능
영화에서 미치광이 과학자가 활약하는 마지막 분야는 인공지능과 로봇이다. 인간과 비슷한 지능을 갖고 있는, 또는 인간의 일을 대신할 수 있는 인조인간을 만들려는 시도는 고대로부터 존재했다. 고대 히브리의 랍비들은 진흙으로 인간의 형상을 제작한 다음 그것에 주문을 걸어 골렘이라는 하인을 만들었다. 골렘은 사람들의 말을 잘 듣는 훌륭한 하인이지만, 유태교의 안식일에 일을 시키면 난폭한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골렘은 현재 롤 플레잉 게임(RPG)의 단골 몬스터로 사용되고 있다.



첨단무기에 대한 미치광이 과학자의 관심이 잘 드러난 ‘언더 시즈 2’

15세기의 연금술사 파라겔수스는 인간의 정액과 혈액, 그리고 이슬을 이용해 ‘호문쿨루스’라는 미니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좀더 현실적인 기록은 18세기 프랑스의 기계 제작자 보오킨슨이 만든 기계 오리다. 수많은 톱니바퀴를 사용해 제작된 이 기계 오리는 진짜 오리처럼 움직였으며 음식을 먹는 시늉까지 냈다고 한다.

영화 속 인공지능과 로봇의 대표주자는 ‘스타워즈’의 R2D2와 쓰리피오다. 하지만 영화 속의 로봇들이 모두 이들처럼 사람의 말을 잘 듣는 친근한 존재인 것만은 아니다. 대부분의 인공지능체들은 나약한 인간을 비웃으며 인간 대신 지구를 차지하기 위한 음모를 꾸민다.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인공지능 컴퓨터 할은 미지의 금속 입방체 탐사에 방해가 된다는 판단을 내린 후 디스커버리호의 승무원을 하나씩 살해한다. ‘데몬 시드’의 인공지능 컴퓨터는 자신을 제작한 과학자를 살해하고 그 아내의 몸을 이용해 자신의 2세를 만들어내는 엽기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버츄어시티’의 인공지능 시드 6.7은 유리 섬유로 이뤄진 로봇의 몸을 훔쳐 인간의 세상으로 탈출한 후 인간에게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다. 이 외에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스카이 넷과 ‘매트릭스’는 인간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대표적인 인공지능이다.

일부 과학자들은 인공지능의 발달이 인류의 미래를 위협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과학자 중 가장 극단적이며 유명한 사람은 시어도어 카진스키다. 카진스키는 하버드 출신의 천재 수학자로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달로 인해 인류의 문명이 붕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경고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첨단기술 분야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에게 폭탄 소포를 보냈으며 그로 인해 3명이 목숨을 잃고 23명이 부상당했다. 그에게는 종신형이 내려졌으며 현재 복역중이다.

‘굿 윌 헌팅’에서 두명의 교수가 윌 헌팅의 장래를 놓고 말다툼할 때 잠시 언급된 수학 천재이자 테러리스트가 바로 카진스키다. 신념을 위해 폭력을 행사한 카잔스키는 또다른 미치광이 과학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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