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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인과의 시간은 왜 빨리 가나?


“미녀와 함께 있을 때 한시간이 1분 같다. 반면 뜨거운 난로 위라면 1분이 한시간처럼 느껴질 것이다.”

상대성원리를 일반인들도 알기 쉽게 설명해달라는 기자들의 요구에 아인슈타인은 미녀와 난로를 끌어들여 이런 멋진 비유를 생각해냈다. 자신들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성이론을 기사로 전달하느라 애를 먹던 기자들도 뜻밖의 수확에 만족했다. 아인슈타인도 자신의 재치에 흐뭇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비유가 상대성이론과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물리학의 시간 개념을 비판하는 철학자들의 주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시간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상대성이론이 발표된 뒤 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 저서 ‘지속과 동시성’을 1922년 발간했다. 여기서 베르그송은 물리학의 공간화된 시간 개념은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느끼는 ‘체험 시간’과는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뉴턴의 절대시간에 따르면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흐른다. 아인슈타인의 시공간에서는 시간의 속도가 관측자의 운동이나 중력장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느 관점을 따르던 그것은 물리학의 시간일 뿐이다.

“시간이 존재합니까? 알 수 없지요. 다만 있다고 가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시간의 본질을 파헤치는데 평생을 바친 소광희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의 결론이다. 소 교수는 “인간은 변화를 통해 시간의 개념을 발견했다”며 “따라서 변화를 느끼는 의식이 없다면 시간도 없다”고 단언한다. 사고로 식물인간이 됐다가 20년만에 깨어난 사람에게 물리적인 시간 20년은 증발해버린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하룻밤을 자고 난 것처럼 느끼며 주위의 엄청난 변화에 어리둥절해한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정하게 흐르는 시계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시간 경험을 하며 살고 있다. 스르르 눈이 감겼는가 싶은데 눈뜨니 벌써 아침이다. 순식간에 7-8시간이 지나가 버린 것이다. 저녁 데이트라도 있는 날이면 하루가 한달처럼 느껴진다. 마침내 사랑스런 그녀를 만난다. “손님, 문 닫을 시간입니다.” 칵테일 한잔을 놓고 잠깐 얘기를 나눈 것 같은데 벌써 자정이 넘었다.

이처럼 종잡을 수 없는 시간 경험에 대해 ‘시간은 의식의 흐름’이라는 철학자들의 해석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할까?

우리 몸에는 수면시간을 알려주는 일주기리듬이나 여성의 월경처럼 월주기리듬을 통제하는 생체시계가 있다. 그런데 이런 생체시계는 시간의 경과를 느끼는 의식의 활동과는 무관하다. 그렇다면 뇌속 어딘가에 시간의식에 관여하는 별도의 시계가 있을까.

지금 어디선가 쇼팽의 아름다운 야상곡이 들려온다고 하자. 이 음악이 감미롭게 들리는 것은 피아노 건반을 눌렀을 때 나오는 음들의 간격, 즉 리듬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능력은 우리 뇌속에 초단위로 시간의 경과를 구분할 수 있는 ‘간격 타이머’(interval timer)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간격 타이머는 어디에 존재할까?





미국 위스콘신의대 스티븐 라오 박사와 동료들은 시간의 경과를 추정케 하는 실험을 진행하면서 참가자들의 뇌활동을 기능성자기공명영상법(fMRI)으로 측정했다. 참가자들은 두쌍의 음을 듣고 나중에 들은 것이 처음 음보다 짧은지 긴지를 판단해야 한다. 이 과정에 관여하는 뇌의 영역은 혈류량이 늘어날 것이다.

실험 결과 대뇌반구의 시상 바깥쪽에 있는 회백질 덩어리인 대뇌핵이 가장 먼저 활성화됐다. 대뇌핵은 원래 운동능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던 영역이다. 연구자들은 대뇌핵 내의 선조세포라는 뉴런이 대뇌피질의 뉴런 등 뇌의 다른 영역의 뉴런 수천개와 네트워크를 형성해 시간 신호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대뇌피질은 지각, 기억, 의식적 사고를 주관하는 영역이다.

이 과정에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 관여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만일 도파민이 제대로 분비되지 않으면 간격 타이머도 서서히 작동한다. 실제 도파민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마리화나 같은 약물을 복용하면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반면 코카인이나 메탐페타민 같은 각성제는 도파민을 활성화시켜 간격 타이머의 속도를 빠르게 하고, 그 결과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처럼 지각하게 한다.


수면시간을 알려주는 생체시계는 시간의 흐름 느끼는 의식의 활동과는 무관하다. 그렇다면 뇌속 어딘가에 시간의식에 관여하는 별도의 시계가 있을까.

그러나 간격 타이머는 리듬을 인식하거나 외야수가 뜬 공을 잡으려고 포착 위치를 예측해 달려갈 때 작동한다. 즉 초단위의 짧은 기간의 시간 경과를 측정하는데 유용할 뿐이다. 간격이 길어질수록 정확성은 급격히 떨어진다. 따라서 간격 타이머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시간의식 전반을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시간 심리학을 연구하는 영국 맨체스터대 심리학과 존 웨어든 교수는 시간에 대한 관심이 시간을 체험하는데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상황에서 우리의 의식은 시간을 재는 일과 시간과 무관한 일로 나누어진다. 이때 시간과 무관한 일에 관심이 쏠릴수록 사건의 진행이 더 빠르게 느껴진다.

예를 들어 시계 초침의 움직임을 뚫어지게 바라본다면 한바퀴 도는데 걸리는 시간, 즉 1분도 꽤 길게 느껴질 것이다. 반면 호적수와 바둑을 두고 있다면 1시간도 순식간에 지나간다. 온 정신이 묘수를 찾는데 쏠려있기 때문이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웨어드 교수는 최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러 상황에서 시간의 경과를 판단케 하는 실험을 통해 이런 경향을 확인했다. 학생들은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나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 시험을 치를 때 시간이 훨씬 빨리 간다고 평가했다. 반면 일을 하거나 지루한 영화를 볼 때, 줄을 서서 기다릴 때 시간이 가지 않는다고 답했다.

한편 아이들의 경우 시간을 재는 과정과 시간과 무관한 과정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 즉 모든 정보가 한데 섞여 있는 셈이다. 그 결과 아이들은 사건이 많을수록 시간도 더 길다고 느낀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생화학과 가이 브라운 교수는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을 대사율의 차이로 설명한다. 대사율은 일정 시간에 동물이 만들어내는 에너지의 양이다. 아이들은 단위 그램 당 대사율이 성인보다 높다. 따라서 맥박이나 호흡이 빠르다. 동작도 민첩하고 분주하다.

브라운 교수는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사는 것처럼 보인다”며 “이들에게는 세상이 매우 늦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램 당 대사율은 나이가 듦에 따라 급격히 줄어든다. 따라서 나이가 들수록 덜 먹고 활동량도 적다. 결국 나이가 들수록 삶의 속도가 느려지고 하루, 한달, 1년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 시계를 자주 들여다볼수록 시간이 좀처럼 흘러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웨어드 교수는 “실생활의 많은 현상들을 볼 때, 간격 타이머보다는 시간에 대한 관심의 정도가 시간 판단에 더 큰 영향을 준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연인과 함께 있을 때 시간이 빨리 흐르는 현상에 대해 이런 심리적 해석에 만족해야할까. 웨어드 교수는 “시간과 두뇌의 연구는 아직 초창기”라며 “두뇌의 시간 판단 기능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모종의 과정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결론지었다.







기억속에서 재창조되는 시간
내가 네게 사과를 건네주던 일, 너의 금발을/ 다정히 매만져주던 일을 너는 아직도 기억하니?/ 너도 알듯이 그건 내가 아직 잘 웃던 시절의 일,/ 그때 너는 아직도 아이에 불과했었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사랑하기’의 아름다운 한 구절이다. 세월이 많이 지나도 옛날 첫사랑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떠오르기 마련이다. 소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을 때 느꼈던 차가우면서도 매끈한 감촉은 평생 잊기 어려울 것이다. 이처럼 시간의 경과와 기억의 퇴색 정도는 그다지 비례하지 않는다. 수십년 전의 에피소드가 세세한 부분까지 떠오르는 반면 일주일 전 점심에 뭘 먹었는지 기억조차 없다.


해마손상으로 기억능력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메멘토'의 한장면.

소광희 교수는 “과거의 시간은 사건과 함께 사라지지만 기억속에 흔적으로 남아있다”며 “강렬했던 경험은 우리의 회상을 통해 때로는 실제보다 길게 재현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기억이 사라질 때 그 사람에게는 더이상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 다소 센티멘털한 궁금증에 대해 정말 그렇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있다.

미국 아이오와의대 신경학과의 안토니오 다마지오 교수팀은 뇌속의 기억에 관여하는 영역에 손상을 입은 사람들을 조사한 결과 이들이 심한 경우 시간의 관념을 잃어버린 채 오직 현재속에서만 살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자들은 기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뇌 영역인 해마나, 해마가 대뇌피질과 양방향 통신을 할 수 있게 중계역할을 하는 대뇌 측두엽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은 기억상실증 환자를 대상으로 기억과 시간의식에 대해 조사했다. 기억이 입력되는 부분인 해마가 손상된 환자는 1분 이상의 기억을 유지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정보를 학습해 새로운 기억으로 저장하지 못하는 전향성 기억상실증을 보인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은 어느 정도 떠올릴 수 있다. 장기적인 기억 정보는 대뇌피질의 신경망에 있기 때문이다.





반면 대뇌피질의 신경망이 손상된 환자는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는 역행성 기억상실증을 앓게 된다. 심할 경우 수십년 동안의 개인적인 기억이 완전히 증발된다. 만일 해마와 대뇌 측두엽이 모두 손상된다면 기억 자체를 잃게 된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뇌가 정상일 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1분전에 있었던 일도 잊어버린다. 반면 수면시간을 알려주는 생체시계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결국 물리적인 시간은 나와 무관하게 쉼없이 흘러가겠지만, 삶의 주체인 우리 자신은 오로지 기억, 즉 경험을 통해 시간을 느끼는 것이다. 과거의 순간을 포착해 흐르는 시간을 재창조한 걸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미 90여년 전에 오늘날 신경생리학이 밝혀낸 시간과 기억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했던 시간 외에 다른 시간은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이 시간이 무너지는 날, 우리도 그와 함께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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