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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동걸린 과학계 ‘히딩크 프로젝트’


우리나라에도 과학기술 4강으로 도약하려면 히딩크 같은 인물을 영입해야 할까? 한국의 온 과학계 이목이 한국과학기술원(KAIST) 신임총장 선출에 쏠려있다.

지난 5월 중순 KAIST는 이례적으로 보도자료를 내고 신임 총장 후보를 공개했다. 개교 이래 처음으로 노벨상 수상자 출신 교수가 신임 총장 공모에 응했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말도 잘 안통하는 미국인이라는 것이다. 공모에 참여한 사람은 199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B. 러플린 현 스탠퍼드대 교수.

KAIST전경. 신임 총장에 대한 학생과 교직원들의 입장은 기대반 우려반이다.

지난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2번으로 국회에 진출한 홍창선 총장의 후임을 뽑는 이번 공모에는 교수협의회가 추천한 물리학과 신성철, 테크노경영대학원 박성주 교수 등 2명 외에도 이미 2-3명이 경합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급작스럽게 발표된 외국인 교수 총장 영입설에 대해 교직원과 학생들은 기대반 우려반이다.



해외파 영입은 정부뜻?
KAIST 총장은 전통적으로 이사회가 선출한다. 공모에 응한 후보자들 가운데 2-3인을 최종 후보로 추려 정부와 학교, 외부인사 15인으로 구성된 이사회의 최종 투표를 통해 총장을 선출하는 방식이다. 총장 직선제가 통용되고 있는 사립대 총장 선출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러플린 교수도 이사회 멤버 5명으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에 공모서류를 제출했다. 하지만 홍 전총장을 비롯해 최근 3대에 걸친 역대 총장들은 교수협의회 추천 후보출신들이라는 점에서 외부인 그것도 외국인 총장의 영입은 ‘파격’ 그 이상인 셈이다.

이번에 KAIST의 외국인 총장 영입은 최근 과기부가 추진 중인 해외 과학자 유치 프로젝트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난 5월 19일 정부는 올해 안에 노벨 과학상 수상자 등 해외 우수 과학자 1백10명을 초빙해 산학연 연구현장에 투입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이달 말까지 국내 대학 출연연구기관을 대상으로 유치 신청을 받겠다고 발표했다. 이 계획안에 러플린 교수 영입 문제가 걸려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러플린 교수는 지난 4월 포항공대에 문을 연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 소장에 선임돼 있는 상태다.

러플린 교수는 지난 5월초 아·태이론물리연구소장 계약을 위해 방한했을 때도 오명 과학기술부 장관을 만났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때 정부측과 KAIST 총장 공모에 관한 ‘교감’이 있지 않았겠느냐라는 추측이다. 게다가 러플린 교수가 과기부를 예방한 지 불과 2주 뒤 KAIST가 공모 사실을 발표했다.




청와대 정찬용 인사수석도 지난 5월 19일 비서실 직원을 대상으로 한 월례강연에서 ‘산삼이라도 찾아 심어야 한다’며 러플린 교수 영입을 사전에 건의 받았음을 시사했다.
KAIST 국제협력처장인 이광형 교수는 “(정부나 이사회와) 사전에 뭔가 확실한 교감이 있지 않았겠느냐”며 “영입이 거의 확실시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경쟁력 확보의 실험대 KAIST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이미 과학계 군살빼기의 첫 케이스로 KAIST를 선택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국제 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과학계의 이른바 ‘히딩크 프로젝트’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외국인 총장 영입을 찬성하는 쪽에서는 무엇보다 국내 최고 수준의 대학인 KAIST가 세계 최고 이공계 대학으로 가기 위해서 선진국형 대학 운영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러플린 교수처럼 학문적 업적과 함께 한국보다 앞선 연구환경을 경험했던 외인부대 용장을 영입해 가차없는 개혁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KAIST의 한 교수는 “국내 최고 수준의 대학이라는 KAIST조차도 벌써부터 안일함에 빠져버렸다”고 실토한다. 국제화 시대에 현실에 안주하려는 교수와 학업 풍토가 KAIST내에도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같은 상황은 서울대나 포항공대 등 국내 상위권 대학 전체가 겪고 있는 심각한 문제라는데 전문가들은 견해를 같이 한다. 특히 학연 지연 등 복잡하게 얽혀있는 교수와 교육행정가들의 이해관계는 이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1971년 한국과학원이란 이름으로 처음 개원한 KAIST. 고급 인재 양성과 국가 과학기술의 첨단화를 위해 설립됐지만 세계 일류급 수준에는 아직까지 못미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해있다.

러플린 교수 영입을 적극 찬성한다는 이광형 교수는 “어디 출신이냐가 중시돼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 성과나 연구업적에 따른 철저한 평가로 교수직이 더이상 철밥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연구 업적과 성과를 공정히 평가해 이에 대한 적절한 보상, 즉 인센티브를 줘서 성취감을 높이고 우수한 학자들을 데려오자는 입장이다. 특히 교수 사회에 만연해 있는 파벌주의와 현실안주를 해결하려면 학연·지연과 상관없는 외국인 총장의 영입은 더더욱 필요하다고 찬성론자들은 말한다.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이룬 소위 히딩크식 해결 방법을 대학에도 도입해보자는 것이다. 이들은 지금 기존의 모든 관행을 뒤집고 대학을 전면 개편하지 않는 한 한국의 대학과 과학 수준은 크게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서울대가 이르면 2005년부터 업적별 인센티브제를 적용해 교수 임금을 차별화하겠다고 발표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서울대 정운찬 총장은 5월 7일 전임강사를 포함한 교수진 1천6백여명 전원에게 구조조정에 적극 협조해줄 것을 당부하는 e메일을 보냈다. 정 총장은 메일에서 “서울대의 개혁은 우리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사회의 명운이 걸려 있는 문제”라며 “서울대에 대한 정부의 획기적 투자가 어려운 상황에서 양질의 교육환경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구조조정이 가능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두 대학의 이같은 행보는 대학이 더이상 조용한 상아탑이 아니라 치열한 무한 경쟁의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최근의 이같은 상황은 세계적 대학과 좀처럼 격차를 줄이지 못하고 있다는 이들 대학과 정부의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 5월 4일 미 과학정보연구소에서 발표한 보고서는 한국이 논문 발표량에서 세계 13위라고 발표했다. 논문 발표량에 따른 순위만을 따져보면 거의 문제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학 순위를 살펴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서울대만이 세계 35위로 1백위권 안에 들어간 것이다. 게다가 전년도에 비해 한단계 내려간 순위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대학들의 ‘위기감’은 더욱 증폭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에 반해 최근 아시아 일부 나라들이 대학 개혁을 위해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근 홍콩대를 비롯해 홍콩과학대 등 홍콩의 대학들은 세계 1백위권 진입을 목표로 급격한 구조조정과 체질 개선에 나섰다. 이들 대학은 우선 신규 채용 교직원 급여를 줄이고 기존 교직원들에 대한 종신고용제 등 ‘철밥그릇’소지가 될만한 모든 제도를 없애기로 했다. 학과 정원이 적은 과는 과감히 폐지했다. 소위 ‘선택과 집중’ 전략을 구사하겠다는 것이다. 대학 총장이나 학장, 교수들은 우수 교수 모셔오기와 연구비 끌어오기 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이런 방식은 이미 미국에서 오래전부터 통용돼 온 방식이다. 미국 대학의 학과는 마치 주식회사를 연상케 해 학과장은 사장과 같다고 한다. 특히 스탠퍼드대나 매사추세츠공대를 키운 힘은 총장과 학과장들의 기업가 같은 철저한 책임 운영제에서 나왔다. 단과대 학장과 각 학과장은 소속 교수의 인사권부터 학과 예산 편성, 운영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한다. 또 파벌과 온정주의를 철저히 배제하는 대신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업적에 따라 철저한 인사 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이번 러플린 교수 영입 문제도 세계 간판급 대학을 육성하기 위한 시범케이스의 일환일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영입은 환영, 결과는 글쎄
러플린 교수의 총장 선임에 대해 KAIST학생들과 교수 사이에서는 “선진 운영 시스템을 들여와 제대로 뿌리내린다면 좋지 않겠냐”며 긍정적인 반응과 “과연 온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냐”는 회의적인 시각이 교차하고 있다. 너무나 뿌리 깊게 박혀있는 고질적 관행을 외국인 혼자 어떻게 당해낼 수 있겠냐는 것이다.

KAIST대학원 총학생회장 김동근씨는 “외국인 총장이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바꿀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라고 한다. 게다가 이사회가 러플린 교수의 영입을 결정한다고 해도 상당 시간 논란거리가 남게 될 전망이다.

사회 일각에서는 교수 신분이 더이상 철밥그릇이 아니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저한 업적별 평가제와 인센티브제도를 도입해 국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의견이 점점 힘을 얻고 있다(사진은 기사와 상관 없음).

문제는 연구팀만을 ‘지휘’해왔던 러플린 교수의 행정능력이다. 일각에서는 러플린 교수가 비록 노벨 물리학상이라는 학문적 성과가 뛰어나지만 수천명의 교수와 학생, 연구원, 직원을 거느린 거대 조직을 제대로 운영할 행정가적 기질이 있겠냐고 반문한다. 하나의 목적으로 뭉친 연구조직을 운영하는 것과 조직적 특성이 다양한 대학을 책임지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KAIST의 한 교수는 “러플린 교수는 현재 재직 중인 스탠포드대를 비롯해 여러 연구를 이끈 경륜이 있다”면서 “누구나 처음부터 총장이 아니듯 그도 같은 잣대로 봐야한다”고 말한다.

과학교육 행정가로서의 능력에 대한 회의와 함께 한국의 교육 상황에 대한 인식 수준과 언어 소통 문제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흘러나온다. 한 대학을 책임지는 총장으로서 민감한 문제를 조율할 때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돼 중요한 일을 그르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입장은 영어로 의사소통이 자유로워지는 최근의 대학 분위기와 맞지 않은, 설득력이 다소 부족한 비판론으로 보인다. 이광형 교수도 “문제가 된다면 총장은 대외적이고 국제적인 활동에, 부총장은 학교 안팎의 살림을 챙기는 형태의 ‘이원집정제’도 고려해 볼 수 있는 일 아니냐”며 “운용의 묘를 살려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작 문제가 되는 점은 이사회의 생각이 아무리 좋다해도 그것을 관철시키는 방법이다. KAIST 이사회는 총장 후보들의 프라이버시 존중을 이유로 원칙상 노출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러플린 교수의 공모 참여를 공개한 점에 대해 정부와 영입파의 언론플레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사회가 지금까지 교수협의회 추천 인사를 비공식적으로 인정해왔으면서 이번에 ‘갑자기’ 러플린의 공모 참여 사실을 공개한데 대해 일부 교수와 학생들은 “그 취지와는 상관없이 결코 투명하지 못한 처사”라는 반응이다. 러플린 교수가 신임 총장으로 선출될 경우 이번 총장 선출 과정에서 발생했던 학내 불협화음을 반드시 조율해야 할 숙제가 남게 된 것이다.

한편 KAIST 총장 선출 과정의 신중성과 공정성에 심각한 의문도 제기됐다. 총장 선출일인 5월 28일을 불과 3일 남짓 남겨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사들에게 후보들에 대한 기본 자료조차 보고되지 않았다. 5월 25일 총장 후보 선임위원회가 최종 2인의 후보를 선정한뒤 이를 이사회에 보고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사들은 불과 3일동안 자료를 검토한 뒤 선출 당일 단하루 단한번에 결정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번갯불에 콩구워 먹는 격’으로, 국내 최고의 대학 총장을 뽑는 방식으로서는 엉성한 감을 씻기 힘들다.



러플린은 누구인가
현대 양자물리학을 고차원으로 끌어올린 분수양자홀 효과라는 새 이론을 발견한 공로로 대니얼 추이 교수(미 프린스턴대), 호르스트 슈퇴르머 교수(미 컬럼비아대)와 1998년도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수상했다. 분수양자홀 효과는 양자유체에 관한 새로운 이론이다.

양자유체란 강한 자기장과 극저온(-2백73℃ 부근)에서 전자들이 액체처럼 운동하면서 저항값으로 분수값을 갖는 상태. 분수양자홀 효과는 매우 정확하기 때문에 정밀한 전기저항을 측정하거나 자기장의 측정표준을 세우는데 중요한 이론 실험적 근거들을 제시한다.

지난 1982년 슈퇴르머 교수와 추이 교수는 반도체에 수직으로 강한 자기장을 걸면 전기저항이 3분의 1에 가까운 분수값을 가진다는 사실을 처음 밝혔고 그 다음해에 러플린 교수가 이를 이론적으로 규명해냈다.

1950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러플린 교수는 미 매사추세츠공대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벨연구소와 로렌스 리버모어 연구소를 거쳐 현재 스탠포드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지난 4월 방한 중 러플린 교수는 한국의 ‘사이언스 코리아’ 운동을 적극 지지하는 뜻으로 사인을 남겼다.

그는 주요 연구업적은 20대 중반 이전에 모두 이뤄진다는 물리학계의 통념을 깨고 32세가 돼서야 주요 논문을 발표하는 등 ‘대기만성형’ 학자로 평가된다. 그는 특히 자신의 전공분야 외에 생명과학, 고온 초전도체, 컴퓨터 분야를 결합한 학문간 연구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9월 국내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도 러플린 교수는 “물리와 생물 등 관계없어 보이는 학문들이 서로 만나 새롭게 연결되는 것이 최근 흐름”이라며 “알려지지 않은 분야를 탐구하려는 열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평소 과학적 성과의 대중화를 주창하는 과학자로 유명하다. 이 때문인지 지난 4월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 소장 취임차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국내에서 전개되고 있는 ‘사이언스코리아’운동에 관심을 표명하고 적극적인 참여의사를 밝혔다.

러플린 교수는 1996년 아·태이론물리센터 현판식 때 처음 인연을 맺은 이래 수차례 한국을 방문해 이미 국내에 폭넓은 인맥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KAIST 총장 공모에 참여하게 된 것도 국내 인맥의 적극적인 권유와 유치활동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KAIST 총장감으로 적격성 여부를 떠나 그에 대한 평가는 두갈래로 나뉜다. 일각에서는 학자로서 그의 ‘외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노벨상 수상 이후 폭넓은 대외활동 때문에 학자로서 연구에 너무 소홀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비판적 입장은 비슷하지만 이와는 좀더 다른 각도에서 우려하는 시각이 있다. 주로 연구팀만을 이끌어온 러플린 교수가 과연 작은 학과도 아닌 거대한 학교 조직을 운영할 수 있겠느냐는 시각이다. 개혁도 좋지만 학내 조율자로서 상징성을 띠는 총장의 역할을 맡기기에는 상당한 위험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반면 한편에서는 선진 교육 시스템과 연구 분위기를 도입해 국내 과학교육의 수준을 한단계 도약시켜줄 구원자로 결코 손색없다는 평이다. 더군다나 한국 과학계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를 해결할 수 있는 인물로 최적격이라고 주위의 지인들은 평가한다.

KAIST 총장 선출 결과가 어찌됐던 간에 그는 앞으로 임기 3년의 아·태이론물리센터 소장으로 활동하면서 포항공대에서 석좌교수를 겸직하게 된다. 노벨상 수상자 출신 첫 교수라는 점에서 벌써부터 그를 통해 국내 물리학 부문의 비약적인 발전을 기대하는 목소리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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