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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 기억을 잃어버리다

드라마 ‘열여덟 스물아홉’
29세가 18세로 되돌아간다
먼저 ‘그럴 수 있다’는 의견. 서울대 의대 신경과 이경민 교수는 “사고 당시와 가까운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은 기억상실증의 한 특징”이라고 말했다. 사람의 뇌 속에서 단기기억(작업기억)이 장기기억으로 바뀌는 과정을 ‘강화’라고 한다. 최신 기억일수록 강화 과정이 늦게 또는 약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잃어버리기도 쉽다.
그러나 동아대 의대 최병무 교수는 “사고 주위의 짧은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10년의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것은 어렵다”고 말했다.

드라마 ‘봄날’에서 남자 주인공은 처음 만난 친어머니와 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당한다. 차 안에서 어머니가 죽고 주인공은 13세로 돌아가는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이 드라마에 대해 연세대 세브란스정신병원 김재진 교수는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기억상실증의 원인은 크게 심리적인 것과 육체적인 뇌 손상으로 나뉜다.‘봄날’의 경우 친어머니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충격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렸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심리적인 원인으로 생긴 기억상실증을 ‘해리성’이라고 한다.

만일 주인공이 충격적인 기억을 잊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면 13세 이후의 모든 기억 대신 친어머니에 대한 기억만을 선택적으로 잊어버릴 것이다. 다만 서울대 이경민 교수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연인을 알아보지 못해도 과거에 사랑하던 감정을 느낄 수는 있다”고 했다.




겨울연가
자기 이름까지 잊어버릴 수 있을까

일본에서 용사마 열풍을 일으킨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남자 주인공(배용준)과 여자 주인공(최지우)은 고교 시절 사랑에 빠진다. 성인이 돼서 다시 만나는데 남자는 여자를 알아보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의 예전 이름도 기억 못한다. 드라마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서도 남자 주인공이 사고 한번 당하더니 예전 기억을 모두 잃고 새로운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아무리 드라마가 상상이라고 하지만 ‘겨울연가’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식의 기억상실증은 지나친 오류라고 의학계는 평가한다. 심리적인 충격이든 사고 때문이든 이렇게 기억 전체를, 그것도 정신은 멀쩡한데 기억만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동아대 의대 최병무 교수는 “이름까지 잃어버릴 정도의 기억상실증이라면 뇌를 크게 다쳐 판단력, 집중력, 언어 능력 등 뇌기능의 상당 부분이 손상됐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뇌에서 기억이 저장된 곳만 선택적으로 파괴되기는 매우 어렵다”고 덧붙였다.
재미있게도 기억상실증 환자가 자기 이름만 잊을 수는 있다. 아내, 애인, 부모, 직장 상사 등 특정인에 대한 기억도 곶감 골라 먹듯 잊을 수 있다. 심각한 갈등 관계에 있는 사람을 잊으려는 일종의 방어 기제다. 연세대 김재진 교수는 “심한 스트레스가 반복되면 드물게도 밤에 꿈을 꾸면서 기억상실증에 걸릴 수도 있다”며 “꿈 속에서 스트레스를 피하려는 무의식적인 정신활동이 매우 활발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첫키스만 50번째
영화 ‘첫키스만 50번째’를 보면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자가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잠만 자면 잊어버린다. 그녀는 마지막에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지만 자신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다. 영화 ‘메멘토’는 증세가 더 심하다. 10분마다 기억이 사라진다. ‘웃찾사’의 ‘희한하네’라는 코너도 비슷한 증상을 웃음의 소재로 삼고 있다.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두 가지 다른 증세가 나타날 수 있다. 하나는 예전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인데, 이를 후행성 기억상실증이라고 한다. 한국의 TV 드라마에 많이 나온 기억상실증이 주로 이 증상이다. 다른 하나는 새로 겪는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다. 앞서 말한 두 영화 모두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다뤘다. 동아대 최병무 교수는 “기억은 지속 시간에 따라 5~10분의 초단기, 며칠 동안의 단기, 몇 달 간의 중기, 몇 년 이상 지속되는 장기기억으로 나뉜다”고 말했다. 두 영화는 초단기 또는 단기기억을 오랫동안 지속시키지 못하는 병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 ‘첫키스만 50번째’에 대해 서울대 이경민 교수는 “하루 종일 발생하는 일들을 잘 기억하고 지내다가 잠만 자면 모두 소실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메멘토’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김종성 과장은 최근 ‘춤추는 뇌’라는 책을 통해 비슷한 환자를 소개했다. 이 환자는 평소에 술을 지나치게 마신데다 뇌졸중에 걸려 기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뇌 양쪽의 해마가 모두 손상됐다. 그는 영화 주인공처럼 새로운 기억을 10분 정도 밖에 유지하지 못했다. 밥을 먹은지 10분이 지나면 먹은 사실을 잊고 밥을 또 달라고 했다.



본 아이덴터티
기억상실증 환자에게 킬러 본능이?

“전문 킬러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이름도 성도 모른 채 평범한 주부로 살아간다. 그러나 요리를 할 때마다 나타나는 눈부신 칼질에 자신의 과거 직업을 요리사라고 생각한다.”
영화 ‘롱키스 굿나잇’의 전반부다. 영화 ‘본 아이덴터티’도 기억상실증에 걸린 CIA요원이 등장한다. 이 영화들의 특징은 주인공이 기억상실증에 걸려도 무술이나 사격 등 신체적인 기능이 여전히 뛰어나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고려대 교육학과 김성일 교수는 “기억은 사건이나 지식에 대한 서술기억, 축구공을 차거나 젓가락질을 하는 절차기억 등으로 나뉜다”고 말한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물리학과 정재승 교수는 “서술기억은 특정 영역에 저장돼 있지만 절차기억은 좀더 교묘한 형태로 저장돼 있어 한번 익히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영화 ‘롱키스 굿나잇’의 주인공은 아직 서술기억이 남아 있는 경우며 많은 기억상실증 환자들이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고 말했다.

영화 ‘페이첵’에서는 뇌의 특정 신경세포를 제거해 기억을 지우는 장면이 나온다. 강원대 심리학과 강은주 교수는 “기억은 한군데가 아니라 뇌의 여러 부분에 네트워크로 분산 저장돼 있다”며 “컴퓨터처럼 뇌의 특정 부위를 제거해 특정 정보를 지우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고 밝혔다. 강 교수는 “특히 오래된 기억일수록 단단하기 때문에 지우기 힘들다”고 강조했다.




잃어버린 기억찾기
머리 부딪히면 기억이 되돌아올까

드라마를 보면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가 종종 머리에 충격을 받고서 기억이 돌아온다. 기억상실을 고치기 위해 일부러 머리를 세게 때리기도 한다. 과연 이런 방법이 효과적일까.
정신과 의사들은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영국국립병원 신경정신과 살리에 박센데일 박사는 이런 장면에 대해 “다리뼈가 부러진 사람이 다리를 다시 다친다고 좋아지는 경우가 있는가”라고 미국 과학잡지 ‘디스커버리’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박센데일 박사는 “기억상실증을 다룬 영화 60편을 분석한 결과 많은 장면이 부정확하다”며 “실제 환자가 자신의 이름 등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경우는 드물며 새로운 기억을 잘 간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영화 ‘니모를 찾아서’에 등장하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물고기가 현실에 가장 많은 사례라고 한다.
그러나 옛사랑과 주고받은 반지를 보다 기억이 떠오르는 장면 등은 비교적 사실적이다. 서울대 이경민 교수는 “아직 검증된 바는 없지만 연상작용을 이용한 기억 인출 연습이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기억상실증 드라마와 영화의 가장 큰 오류. 이들 드라마만 보면 기억상실증이 자주 일어나는 정신병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억상실증은 실제로 매우 드문 정신질환이다. 기억상실증의 남발이야말로 상당히 비과학적인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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