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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가 더 이상 여자일 수 없는 이유 - 춤은 사회를 바라보는 창


차이코프스키의 익숙한 음악이 흐른다. 여리고 가냘픈 몸매의 발레리나가 등장할 거라고 예상한 관객들, 눈을 의심한다. 하지만 이내 ‘선 굵은’ 남자 무용수가 연기하는 ‘힘이 넘치는’ 백조에 열광한다. 고전발레의 ‘백조=여자’라는 고정관념을 과감히 깨고 남자 백조를 선보인 영국 안무가 매튜 본의 댄스뮤지컬 ‘백조의 호수’는 최근 한 기업의 TV 광고에도 사용돼 좋은 반응을 얻었다.

춤도 변한다. 춤은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언제부터, 왜 춤을 추기 시작했을까.



원시춤은 없다



춤은 흔적이 남지 않는다. 동굴 벽에 그려진 그림이나 조각으로 원시시대 춤의 파편을 찾을 수는 있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미 인류는 춤을 췄을지 모른다. 그러니 고고학 발굴로 춤의 기원을 밝혀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발레


고전발레의 여성 백조(좌)와 현대판 남성 백조(우). 이제 백조는 더 이상 여성 무용수의 전유물이 아니다.

많은 무용학자들은 인간이 지구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때부터 춤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춤의 기원에 대한 여러 가지 가설을 내놓았다.

인류의 조상들은 맹수로부터 종족을 보호하고 야생의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그래서 자연을 경외하고 신을 기리는 의식을 치렀다. 이때 인간과 신의 의사소통을 매개해준 것이 바로 춤이라는 설이 있다. 또 이성에게 구애하기 위해, 언어 이전 초기 형태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부족의 연대를 위한 집단 활동의 하나로, 그냥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서 춤을 췄다는 설도 있다. 일부 무용학자들은 초기 인류가 별의 움직임을 보고 춤을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춤과 연관시켜 연구하는 분야가 바로 무용인류학이다. 초기 무용인류학자들은 춤의 기원을 알아보려면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오지처럼 현대문명에서 고립돼 있는 곳의 춤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곳 사람들이 추던 ‘원시춤’이 지금의 여러 춤을 있게 한 모태가 됐을 거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최근 조안 휠러 케아리이노호무쿠를 비롯한 여러 무용인류학자들은 “그런 원시춤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춤은 추는 목적에 맞게 지역, 민족, 시대, 사회에 따라 각각 발전해왔기 때문에 특정 지역 또는 부족의 춤을 춤 전체의 기원으로 생각하는 건 잘못된 발상이라는 얘기다.

춤은 인류의 보편적인 문화다. 하지만 춤을 추는 이유나 춤 동작에는 그 사회의 특징적인 관습이나 민족성이 담겨 있다. 심지어 유전적으로 결정된 신체의 차이가 반영되기도 한다.



현대무용의 발달로 춤의 진화에 가속이 붙었다. 지금도 무용가들은 몸으로 그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와 시대를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몸집이 큰 미국 모하비 인디언 여인은 동부 아프리카 마사이족처럼 높이 뛰어오르는 동작을 할 수 없고,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현대문명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부족의 춤일지라도 그건 그들만의 문화일 뿐이다.

 

춤과 사회는 뗄 수 없는 관계



원시시대의 부족사회에서 왕권사회로 넘어오면서 춤의 의미도 변했다. 왕에게 중요한 건 자연을 경외하는 의식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왕권을 무사히 유지하느냐다. 왕은 자신이 절대적인 존재라는 점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춤을 이용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춤이 바로 궁중무용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왕실의 춤은 중국에서 수입했다. 무용전문가들은 중국 문화를 숭상했기 때문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우리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가 이뤄지기 시작한다. 민간에서 유행하던 춤을 끌어다가 변형시킨 것. 대표적인 예가 ‘어부사’란 노래를 부르며 뱃놀이 흉내를 내는 춤인 선유락(船遊樂)이다.

14세기 이탈리아에서 탄생한 발레는 프랑스로 넘어오면서 유럽 왕실의 대표적인 춤이 된다. 왕족은 발레를 배우고 감상하면서 왕실의 우아함과 왕권의 신성함을 과시했다.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는 그 자신이 발레의 주역 무용수이기도 했다. 그 후 시대의 변화에 따라 파반, 알망드, 쿠랑트 같은 조금 빠른 템포의 발레음악도 등장했다.



오늘날 발레는 가히 서양무용의 대표라고 여겨질 정도로 전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1970년대 케아리이노호무쿠는 “발레도 그저 유럽 민족무용의 하나일 뿐”이라고 말해 서양 무용계에 일약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발레의 동작에 주목했다. 예를 들어 남자 무용수가 넷째 손가락을 가리켜 보이는 건 결혼하자는 뜻으로, 반지의 의미가 일찍부터 발달했던 서양문화가 담긴 동작이다. 또 다리를 쭉 뻗어올리는 동작이 서양에서는 아름답고 기교 있게 보일지 모르나 동양에서는 예의 없는 행동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림설명) 형식적인 전통 발레를 비판하면서 맨발로 자연스러운 춤을 추겠다고 선언했던 미국의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각종 실험무용이 시도되면서 현대무용이 탄생한다. 동작을 최소화하는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을 추구하거나, 무용을 전혀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공연을 하거나, 수학공식으로 동작의 조합이나 패턴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송종건 무용평론가는 이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성행했던 당시의 사회적 배경이 무용에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현대무용가이자 무용인류학자인 드리드 윌리엄스는 그의 책 ‘인류학과 인간의 움직임’에서 “춤이라는 인간의 움직임과 사회적 상황, 의도, 신념, 가치체계는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관계”라고 결론내리고 있다.



춤도 끊임없이 진화한다


요즘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자. 춤 잘 추는 가수들에 열광하는 것도 모자라 너도나도 춤을 배우려고 나선다. 이에 대해 무용인류학을 전공한 최해리 월간 ‘몸’ 편집장은 “억제돼 있던 춤의 코드가 회복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자신의 감정이나 의사를 드러내놓고 표현하지 못했잖아요? 1990년대 들어서 정치도 어느 정도 안정되고 생활도 풍족해졌죠. 우리는 일본이나 미국과 다르다는 문화적 정체성에도 눈뜨기 시작했고, 몸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면서 사람들이 춤으로 눈을 돌리게 된 거죠. 과학기술의 발달로 영상매체가 널리 보급된 것도 큰 기여를 했어요.”

최근 우리 대중문화에서 유행한 춤에도 시대의 변화가 반영돼 있다.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회오리춤, 현진영과 와와의 엉거주춤 등 1990년대 상반기를 장식했던 춤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추는, 남성 중심의 힘이 넘치는 게 대부분이었다. 1990년대 하반기에는 룰라의 엉덩이춤, 이정현의 와춤처럼 소수 인원 또는 혼자 추는 춤이 유행했다.

2000년대는 섹시미를 강조한 여성춤의 전성시대다. 박지윤에서 시작해 이효리, 보아, 채연, 서인영으로 이어지는 여성 댄스가수들의 춤이 브라운관을 장식하고 있다. 최해리 편집장은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는 걸 자연스럽게 여기는 분위기가 춤에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국립무용단의 공연
지난해 국립무용단의 공연 ‘잎새에 이는 바람’ 중 한 장면.



최근에는 우리 고유의 춤사위에 현대성을 가미한 한국창작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홀로그램 같은 첨단 영상기법으로 새로운 형식의 무용을 창안하는 시도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송종건 무용평론가는 “서구에서는 실제 무용수와 가상 애니메이션 이미지가 3차원 공간에서 함께 움직이는 디지털무용도 연구 중”이라며 “과학기술의 발달이 춤 문화를 변화시키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강조한다.




차도에서 누군가 엄지손가락을 세운 채 팔을 위아래로 흔들고 있다면 우리는 태워달라는 뜻이구나 하고 짐작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에게는 이 동작이 욕이라고 한다. 이처럼 같은 동작이라도 지역이나 민족에 따라 의미가 다를 수 있다.

춤도 마찬가지다. 영국 언어철학자 넬슨 굿맨은 그의 책 ‘예술의 언어’에서 “전세계 공용어가 없듯이 세계 각국의 무용은 서로 성격이 다르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춤도 해석이 필요하다. 동작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알고 제대로 번역해야 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무용인류학자의 역할이다.

춤은 이 시간에도 계속 진화하고 있다. 현대판 ‘백조의 호수’에 등장하는 백조가 계속 여자일 수만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진화하는 춤과 인류 사이에 바로 무용인류학자가 있다.



움직임은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거울



무용이론가 루돌프 라반은 사람의 동작을 분석하는 방법을 체계화시켜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했다. 이것을 ‘라반동작분석’(LMA)이라고 한다. LMA는 움직일 때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신체의 모양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얼마나 세게 움직이는지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동작을 관찰한다. 이를 토대로 성격이나 심리상태를 파악해내는 것이다.


북한무용수
2003년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평화통일 기원의 밤 행사에서 펼쳐진 북한 공연.



LMA를 응용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무용동작치료. 무용동작치료는 움직임으로 그 사람의 특성을 알아낸 다음 그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고,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감정이나 욕구를 동작으로 표출할 수 있게 하는 심리치료 방법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전쟁후유증으로 정신질환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적용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미국 공인 무용동작치료전문가(ADTR) 류분순 한국무용치료임상연구원장은 “식사장애 여성, 성폭력 피해여성, 자폐아에서 무용동작치료의 효과가 실제로 보고됐다”고 말한다.

“야구선수가 공을 던질 때 어떤 부위를 얼마나 움직이고, 공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빠르고 정확하게 스트레이트가 될까요? 이를 해결하려면 동작을 면밀히 분석하는 게 우선이죠. 이때도 LMA가 쓰여요.”

라반이론을 전공한 최성희 동작분석가의 설명이다. 무용수, 안무가, 연극배우에게도 동작분석은 필수다. 가벼운 물체를 드는 걸 표현할 때 팔을 얼마나 움직여야, 시선은 어떻게 처리해야 관객이 공감할지 고민이다. 이럴 때 깃털을 날리는 동작, 비누방울을 살살 튀기는 동작을 분석하면 표현 능력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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