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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가 증권가로 간 까닭은 - 이공계는 대박낳는 황금송아지


요즘 은행에 가 보면 ‘주가지수연동(ELS)정기예금’이라는 것을 판다. 정기예금 이자로 1년에 기껏해야 5%를 주는데 이 상품은 주식값이 많이 오르면 7%를 주고 별로 안 오르면 4.5%만 주는 상품이다. 주가가 오르면 높은 이자를 받고 주가가 안올라도 어느 정도 이자가 보장되니까 손님들 입장에서는 별로 나쁠 게 없어 보인다. 그래서인지 은행 고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2002년 이후 20조원 이상이 팔려나갔다.

그러나 주가가 정말 많이 오르면 그 많은 고객들에게 약속대로 높은 이자를 줘야 하는 일이 발생하고 은행은 큰 손해를 입는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예금을 자신 있게 팔까? 주가가 정말 그렇게 오를 리는 없다는 확신 때문일까?

사실 은행도 속으로는 이런 걱정을 한다. 그래서 은행도 ‘옵션’이라는 파생상품에 따로 투자해 놓는다. 옵션은 주가가 떨어지면 큰 손해를 보지만 주가가 많이 오르면 큰 이익을 얻는 복권 같은 금융상품이다.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의 금융공학 강의 현장. 폭넓은 경제·경영 지식과 뛰어난 수학·과학 능력의 결합이 우수한 금융공학 전문가를 만든다.

그래서 실제로 주가가 많이 올라서 고객들한테 이자를 많이 줘야 하는 상황이 되면 그 옵션을 팔아서 고객들에게 이자로 준다. 주가가 떨어지면 고객들에게 이자를 적게 줘도 되니까 은행 입장에서는 큰 손해도 큰 이익도 아닌 셈이다. 얼마나 멋진 아이디어인가.



머니상품 개발하는 금융공학
은행 입장에서는 이런 상품을 개발한 직원을 하루에 몇 번이라도 안아주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은행을 비롯한 여러 금융기관들이 이공계 출신의 채용을 늘리는 것은 이처럼 복잡한 파생상품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주가지수연동예금은 비교적 단순한 파생상품의 결합이다. 실제 금융공학을 응용해서 투자상품의 미래가치를 구하는 과정에는 기체의 움직임을 연구한 브라운법칙과 열역학법칙, 심지어는 인체의 신경계를 응용한 모델까지 등장한다. 과학자의 마인드가 있으면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없으면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금융공학을 공부한 한국채권평가 김미애 박사는 “외국은 수학 전공자 상당수가 금융권으로 진출하고 있다”며 “아직도 실무자들이 매우 부족해 이 분야는 이공계의 중요한 진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첨단기업이 늘어나면서 기술을 정확히 분석할 수 있는 이공계 출신 애널리스트가 각광받고 있다.

금융기관에 이공계 출신들이 계속 늘어나는 또 다른 이유는 금융기관이 처한 환경의 변화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자본시장이 개방되고 벤처 붐과 함께 주식시장이 활성화되면서 금융회사들은 전보다 복잡한 숙제를 풀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은행들은 담보가 없는 회사의 기술력과 제품 경쟁력을 믿고 돈을 빌려줘야 하는 일이 늘어났다. 증권사들은 최첨단 기술로 무장했다고 주장하는 벤처기업 가운데 어떤 회사가 진짜 알짜인지를 가려내는 것이 돈을 버느냐 잃느냐의 관건이 됐다.

최근 서울신문이 올해 은행에 입사한 신입직원들의 전공을 분석한 결과 이공계 출신비중은 평균 13%를 기록했다. 은행원 10명 중 1명은 이공계 대학 졸업생인 셈이다. 전공도 기계공학, 건축공학, 통신공학, 환경공학 등 다양했다. 국민과 신한은행은 올해 신입사원 중 이공계 출신을 20% 넘게 뽑았다. 지난해 공대 졸업생을 5명 뽑은 수출입은행은 최근 이공계 출신 직원만을 모아 각종 프로젝트의 환경영향평가 등 전문 기술지식을 제공하는 ‘기술지원실’이란 부서도 따로 만들었다. 산업은행은 2000명 가까운 직원 중 10% 이상이 이공계 출신으로 금융권에서 이공계가 가장 많이 근무하는 금융기관이다. 산업은행의 산업기술부는 40명 넘는 부원이 모두 이공계 전공자로 채워져 있다.

우리나라 고교생의 절반 가량이 이공계를 지원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아직 이공계 출신의 비중이 낮다. 그러나 몇 년 전만해도 이공계 출신 은행원을 ‘전공을 살리지 못한 부적응자’ 정도로 인식했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급격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금융권 임원들 중에도 이공계 출신이 꽤 눈에 띈다. 제일은행 현재명 부행장(서울대 응용수학과)과 로버트 코헨 전 제일은행장(프랑스 에콜 이학 석사), 리처드 웨커 전 외환은행장(미주리공대) 등도 이공계를 전공했다. 국민은행 이상진 부행장(서울대 농대), 조흥은행 최인준(미국 콜롬비아대 산업경영학과), 오용욱(고려대 농화학과), 김희수(고려대 농화학과) 부행장, 하나은행 서정호(텍사스공대), 조봉한(서울대 계산통계학) 부행장보 등도 이공계 출신 은행권 인사들이다.

이공계 출신의 약진이 돋보이는 또 하나의 분야는 증권사의 기업분석팀이다. ‘애널리스트’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들은 대부분 30대의 젊은이지만 말 한마디로 기업들의 주가를 좌지우지할 만큼 주식시장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미국 나스닥의 주식 시세표.

애널리스트라는 직종이 처음 생겼을 때는 대부분 상경계열 전공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지만 최근에는 이공계 출신의 비중이 점점 늘고 있다. 이유는 단 하나다. IT와 바이오 등 과거에 없던 첨단 업종이 등장하면서 기술력과 제품의 경쟁력을 판단하기 위한 이공계 지식이 필수 요소가 됐기 때문이다.

대신증권에서 통신장비 업종을 맡고 있는 김강오 애널리스트는 재료공학 석사과정까지 마친 정통 엔지니어다. 98년 대학원을 졸업한 후 시스템설계 전문업체인 SK C&C에서 근무하다가 애널리스트로 변신했다.

“지금 당장은 똑같이 30억원의 이익을 내는 회사라도 제품의 경쟁력에 따라 기업가치가 수십 배 수백 배씩 차이가 나죠. 그래서 재무제표만 보고는 기업가치를 결정하기가 어려워요. 또 어떤 IT업체가 신기술을 개발했다고 발표했을 때 그 기술의 가치와 파급효과가 얼마나 될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기술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기술자가 아니면 어렵습니다.”




김강오 애널리스트는 신제품을 내놓은 휴대폰 회사를 방문할 때마다 순간적으로 다시 공학도가 돼 제품을 찬찬히 뜯어본다고 한다. 이런 애널리스트들 앞에서 ‘이게 바로 최첨단기술이 적용된 획기적인 제품’이라고 근거없는 허풍을 떨다간 큰 망신을 당한다. 코스닥 기업의 한 홍보 책임자는 “예전에는 애널리스트들이 탐방을 오면 재무제표를 보여주고 간단한 기업소개를 하면 그만이었는데 요즘은 기술력과 제품에 대해 어려운 질문을 하는 애널리스트가 많아서 아예 연구소장을 불러와 설명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가끔은 인문계 출신 애널리스트가 이공계 대학원을 다시 다닌다. 대우증권에서 제약업종을 담당하고 있는 임진균 애널리스트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애널리스트로 일하다가 지난 99년 중앙대 의약식품대학원에 진학해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메리츠증권의 김한 부회장은 “파생상품이 늘어나고 기업분석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증권사들은 이공계 출신들에 대해 문을 활짝 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이공계 전공자들이 금융권에 뛰어드는 것을 주저하기 때문에 사람을 뽑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은행과 증권사가 이공계 인력들이 약진하고 있는 분야라면 창업투자회사는 이미 이공계 인력이 상당부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중소기업청이 지난 8월 국내의 102개 창투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창투사의 투자심사역 가운데 이공계 전공자는 32%나 됐다. 투자심사역의 임무는 막 태어난 초기 벤처기업의 가능성을 판단해서 돈을 투자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직원이라고는 창업주인 사장과 선후배들, 재무제표는 제대로 만들지도 않고, 자산이라고는 검증되지 않은 기술과 조악한 초기제품 뿐인 신생 기업의 가치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 회사의 기술 수준을 한눈에 알아보는 혜안이 필수다.




한미창투의 황창석 이사가 대표적인 예다. 그는 국내 창투업계의 1세대 심사역이다. 대학에서 생물과학을 공부하고 경영학 석사를 마친 후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다가 96년부터 창투사 심사역으로 일해왔다. 바이오라는 개념도 불분명하고 벤처투자라는 개념도 애매하던 시절부터 황창석 이사는 바이로메드, 크리스탈지노믹스, 에스디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바이오 벤처를 발굴했다.

금융권 임원들은 이공계 전공자의 전문지식에 대해 ‘쉽게 쌓아올리기 어려운 진입장벽’이라고 치켜세운다. 그러나 그 조건이 훌륭한 금융전문가를 만드는 모든 것은 아니라는 점도 함께 강조한다.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잣대로 인간의 투자행동을 해석하고 예측하자면 그 과정에서 필연적인 오류가 발생한다. 이것이 ‘투자를 위한 과학’이 갖는 약점이자 해결해야 할 중요한 숙제다. 물론 이 숙제도 상당부분은 금융의 바다로 뛰어든 과학자들이 풀어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래서 늘 쉴 틈이 없다.


이공계 출신 애널리스트들이 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 앞에 모였다. 왼쪽부터 B&F투자자문 김일봉, 한국투자증권의 김현수, 교보증권 이대우, 푸르덴셜투자증권 정시화 애널리스트.
인터뷰 김동석 교수 - 콴트의 시대가 옵니다.
KAIST에서 금융전문대학원 설립 책임자를 맡은 김동석 교수는 앞으로 금융공학이 머니시장을 주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콴트는 무엇을 하나.
금융회사에서 파생상품을 개발하고 위험을 관리한다. 갈수록 금융상품이 복잡해져 뛰어난 수학 능력과 금융 지식을 갖춘 콴트가 꼭 필요하다.
- 한국 실정은 어떤가.
산업은행 등이 일부 파생상품을 거래하고 있지만 질과 양에서 아직 부족하다. 국내의 주가연동예금(ELS)은 대부분 외국 상품을 빌려온 것이다. 외국 은행은 박사가 수백 명인데 우리는 한두 명이다. 우수한 콴트가 많이 나와야 세계에 밀리지 않는다.
- 금융전문대학원은 어떻게 추진되나.
현재 KAIST 테크노MBA 중 금융 전공이 1, 2학년 포함해 90여명이다. 대학원으로 확대되면 내년부터 200여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현재 금융전공 학생 중 이공계는 16%다. 내년에 50억원을 지원받으며 세계 최고 수준의 교수진과 교육프로그램을 구성할 계획이다.

이진우 기자는 서울대 재료공학부를 졸업하고 1999년부터 7년째 기자생활을 하고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경제현상과 돈의 흐름을 알기 쉽게 전달하는 일이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평화에도 기여한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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