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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고 싶은 물리 - '가문의 영광' 찾아 변신 꾀한다


몇 년 전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한 이공계 위기설은 이제 ‘친숙’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수험생은 ‘학문적 호기심’ 보다는 ‘돈 되는 전공’에 우선순위를 둔다. 교수들조차 약대 가고 남은 학생들이 공대에 온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한다. 대학 진학 뒤에도 부전공을 살리거나 전공과 동떨어진 고시공부로 언제든 전공을 ‘버릴’ 준비가 돼있다. 이런 이공계 위기의 밑바닥에는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등 기초 학문의 위기가 놓여 있다. 2005년은 유엔이 정한 ‘세계 물리의 해’다. 올해가 가기 전에 이공계 위기 속에서 한국 물리학의 현주소를 짚어봤다.



가문의 영광에 위기가 닥쳤다?
10년 전만 해도 물리학은 이공계열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전공이었다. 물리학과를 지원한 수험생은 대부분 학교에서 날고 기는 수재였다. 어릴 때부터 ‘될 성 부른 나무’처럼 보인 ‘떡잎’들인지라 아인슈타인을 동경하며 천재 물리학자의 길을 걷겠노라고 다짐 한번 안해본 이가 없을 정도다. 서울대 물리학과에 합격이라도 하는 날에는 마을 어귀에 플래카드가 걸렸다. 물리학도는 학교의 얼굴이요, 가문의 영광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맥스웰? 커피 이름 아니에요?”

최근 2학기 수시모집에서 동국대 컴퓨터공학과에 최종 합격한 3학년생이 대뜸 이렇게 얘기했다. 그는 자연계열에 과학탐구영역 중 물리를 선택했다. 미래의 컴퓨터공학도답게 물리 중에서도 전자기학을 좋아한다. 렌츠의 법칙, 플레밍의 왼손, 오른손 법칙을 줄줄 꿰고 있다. 그런데 ‘전자기학의 아버지’격인 맥스웰은 알지 못했다. 담당 교사는 “교과서에 맥스웰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림설명) 올해로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한지 꼭 100년이 된다. 이를 기념해 유엔은 2005년을 ‘세계 물리의 해’로 정하고 포스터를 제작하는 등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했다.

중앙대 물리학과에 합격한 또 다른 3학년생은 과학탐구영역에서 선택한 과목이 물리가 아니라 화학이다. 지원 자격에 물리II를 선택해야 한다는 조건이 없어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물리는 ‘면접용’으로만 준비했다. 그는 물리학과에 지원한 동기 중 하나를 “경쟁률이 낮아서”라고 털어놨다.



맥스웰이 커피 이름?
이유와 과정이야 어찌됐든 물리학과에 학생을 받을 수 있는 대학은 상황이 나은 편이다. 한국물리학회 김채옥 회장(한양대 물리학과 교수)은 “예전 물리학과의 명맥을 유지하는 대학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며 “수도권 대학보다 지방 대학이 훨씬 더 몸살을 앓고 있다”고 밝혔다.

지방 대학의 경우 물리학과 자체가 사라지거나 심한 경우 물리학과를 없애라는 압력을 받기도 한다. 대구 인근 대학의 경우 대구가톨릭대는 자연대와 공대 어디에도 물리학과가 존재하지 않고, 대구대나 영남대는 대학원의 규모가 줄었다. 물리학과 대신 반도체학과, 디스플레이학과, 디지털물리학과 등 ‘돈 냄새 풍기는’ 이름으로 바꿔서라도 물리학과를 유지하려는 대학도 있다.



(그림설명) 지난해 7월 포항공대에서 열린 국제물리올림피아드에 참가한 각국 대표 학생들. 국제물리올림피아드는 자국의 물리 실력을 평가받는 자리기도 하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로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요인은 “학생 수가 줄었기 때문”이다. 물리학과에 진학하는 학생 수가 줄었고, 학부를 졸업한 뒤 대학원에 진학하는 대학생 수도 줄었다. 이 정도면 한국에서 물리학은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 아닐까. 김채옥 회장은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진짜 물리학의 위기가 닥칠지 모른다”고 전망했다.





전반적으로 보면 현재 물리학과의 교수 보직은 매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실제로는 제로섬”이라고 말했다. 물리학과가 유지되는 상위권 대학 몇 곳에서 보직이 늘어나는 동안 지방에서는 줄어들거나 아예 없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젊은 연구 인력은 부족한 편이다. 이대로라면 물리학계에도 차츰 ‘고령화’ 현상이 나타날 것이 뻔하다.

김 회장은 “지방의 물리학이 죽으면 물리학도 살 수 없다”며 “연구인력의 순환 고리가 끊어지는 순간 물리학의 위기는 현실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경북대 물리학과 손동철 교수는 “물리학의 위기 보다는 물리학의 응용 범위가 넓어져 생기는 현상으로 해석하는 편이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리학을 전공하면 그 만큼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뜻. 복수전공으로 전자공학이나 컴퓨터공학, 수학 등을 선택할 때 물리학을 전공한 학생은 공부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부전공을 살리기도 쉽다. 하지만 이 경우 물리학과 입장에서는 학생 수가 줄어든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올해 한국 학생들은 국제물리올림피아드에서 종합 12위를 기록했다. 2003년에 1위, 2002년과 지난해에는 2위에 오른 바 있어 물리학 실력이 ‘추락’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물리는 움직이는 거야
실제로 대학생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오동엽 씨는 최근 서강대 대학원 물리학과에 합격했다. 오 씨는 광학실험실에서 공부를 계속할 계획이다. 그의 학부 전공은 사학, 물리학은 복수전공이다. 그는 고등학교 때 인문계였기 때문에 수학이나 물리를 자연계 학생들보다 깊이 배우지 않아 대학에서 관련 기초 과목을 듣는 수고도 감수해야 했다.

오 씨는 “경제나 경영 등 인문학에서 돈이 된다는 전공을 공부해봤지만 피부에 와 닿지 않았고 물리학을 공부해보니 적성에 맞았다”며 진학 이유를 밝혔다. 이상화(서강대 물리학과 4년) 씨는 오 씨처럼 물리학과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을 갖고 있다. 이 씨는 “물리학과 졸업반 35명 중 20명 가량이 물리학과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작년에 고작 3명이 진학한 것에 비하면 이례적인 진학률이다.




(그림설명) ‘이렇게 재미있는데.’ 한 과학전시회에 참가한 어린이들이 다양한 비눗방울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

이 씨는 “서울대 대학원 물리학과에도 시험을 치렀는데 면접을 보러갔을 때 올해 지원율이 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전반적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물리 공부를 해보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는 물리학의 위기라는 말조차 꺼내기가 무색한 분위기다. 윤혁(물리학과 4년) 씨는 “간혹 전과를 고민하는 학생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물리학과 학부를 졸업하면 물리학과 대학원으로 진학한다”고 말했다. 가장 큰 이유는 물리를 좋아하기 때문이란다. 자신도 이미 진학할 연구실까지 결정해놓은 상태다.




KAIST 물리학과 남창희 교수는 “KAIST의 경우 어릴 때부터 과학에 흥미를 키워온 학생들이 대부분이라 물리학에서도 특별히 위기라고 할 만한 조짐은 없다”고 밝혔다. 만약 물리학의 위기처럼 느껴지는 징후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역사에 기복이 있듯이 일종의 주기가 있어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겠냐고 예측했다.

이런 분위기는 과학고에서도 마찬가지다. 경기과학고 윤종수 교사(영재교육부장)는 “과학고에서는 물리학의 위기라는 말은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며 “여기서는 오히려 지구과학이나 생물학이 위기”라고 밝혔다. 과학고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물리학을 어려워하면서도 열심히 한다고 한다. 물리학을 과학의 기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림설명) ‘물리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처럼 세기의 과학자는 물리학자 위주로 알려져 ‘물리는 천재만 한다’는 오해를 낳기도 한다.

조정규(경기과학고 3년) 군은 올해 국제물리올림피아드에 출전해 동메달을 수상했다. 물리학이라면 어느 누구보다도 ‘미운 정 고운 정’이 많이 들었다. 최근 조 군은 수시모집에서 성균관대 의대에 지원해 합격했다. 그런데 물리학에 등을 돌린 것이 아니란다. 평소 조 군은 물리학에서도 움직이는 것에 관한 연구에 매력을 느꼈다.

그는 “인간공학이나 스포츠공학을 공부하고 싶다”며 “의대에서 인체를 제대로 공부한 뒤 다시 물리학을 공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천재와 여자에 대한 오해
그래도 여전히 물리학에 대한 ‘오해’가 말끔히 풀리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으레 ‘물리처럼 골치 아프고 어려운 학문은 천재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화여대 과학교육과 김성원 교수는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호킹 같은 위대한 과학자는 물리학자 위주로 알려져 있어서 그렇지 평균적인 능력만 되면 누구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채옥 회장 역시 “유독 물리학에서는 어렵게 가르치고 어렵게 배우는 관례가 이어지는 것 같다”며 “생활 속의 물리로 파고들지 못한 것이 그런 오해를 낳은 것 같다”고 밝혔다. 물리학을 공부하면 반드시 물리학자가 돼야 한다는 ‘편견’과 ‘부담’을 버리라는 것. 사람에 따라 물리학은 두꺼비집을 고치고, 운전을 능숙하게 하는 등 생활에 유용한 교양이 되기도 하고, 물리학을 전공한 뒤 증권가에 진출할 수도 있으며, 학생을 가르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최근 물리교육계에서는 ‘맞춤형’ 물리교육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수학 없는 물리, 수학 있는 물리, 쉬운 물리, 어려운 물리, 재미있는 물리, 재미없는 물리 등 대상에 따라 물리를 가르치는 접근 방식이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림설명) ‘우리 실험하게 해주세요~!’ 수업시간에 제대로 실험만 해도 물리를 좋아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학생들이 많다.



서울대 교육종합연구원 장경애 박사는 “수학이 필요 없는 대상에게는 수학 없는 물리를, 과학적 마인드가 필요한 곳에는 과학에 흥미를 줘 어렵지 않게 물리를 즐길 수 있도록, 물리를 즐기는 대상에겐 고급 물리를 제대로 가르치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장 박사는 “물리의 대중화가 이뤄지려면 수요자 중심으로 빨리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물리를 공부하는 여성도 또 다른 ‘오해’의 대상이다. 인문계 고교에서 여학생이 과학탐구영역으로 물리를 선택하는 일은 흔치 않다. 오은혜(서울 금천고 3년) 양은 “3학년 여학생 60명 중에서 물리II를 선택한 사람은 3명밖에 안된다”며 “암기하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해서인지 화학으로 몰린다”고 밝혔다.

대학 물리학과에도 여자는 ‘홍일점’ 대접을 받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다. 변혜석(서강대 물리학과 3년) 씨는 “선배나 친척들은 물리학과 여학생의 경우 졸업하고 교사가 되면 제일 잘 풀린 경우라고들 한다”고 밝혔다. ‘여자가 물리 공부해서 얼마나 잘 나가겠느냐’는 식의 사회적 편견이 아직도 박혀 있는 것이다. 변 씨 역시 교직, 대학원, 고시, 공무원 시험 등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 없지만 아직까지 진로를 결정하지 못했다.




김성원 교수는 “넓게 보면 여성에 대한 인식이 잘못됐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일례로 몇 년 전 여성친화프로그램이 개발됐을 때 패션, 화장, 요리 등 사회적으로 ‘여성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소재에서 물리학에 접근하는 경우가 있었다.

김 교수는 “선천적인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데 물리학에서 남자와 여자를 구분 짓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미국 시카고대 김영기 교수나 메릴랜드대 서은숙 교수 등 뛰어난 여성 물리학자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밝혔다.




조연과 엑스트라 없는 영화도 있나
물리학이 위기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요즘 국내에서 최고 인기는 단연 생명과학이다. 구송이(서울 금천고 3년) 양은 “황우석 교수님 때문인지 수시 모집에서 생명과학 계열이 경쟁률이 높았다”고 말했다.

반면 물리학계는 현재 그런 ‘스타’ 과학자가 없다. 정경호(서울 금천고 3년) 군은 “이휘소 박사는 알고 있지만 지금 활동하는 물리학자 중에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장성(KAIST 물리학과 2년) 씨도 “같은 물리학과에 있는 교수님들 이름도 다 알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스타 물리학자가 나올 때도 되지 않았는가. 다들 시기가 무르익었다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김성원 교수는 “영화 한 작품을 만들 때도 주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조연, 엑스트라가 있어야 하듯 일반 연구자들의 연구 토양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스타 과학자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 한국은 도리어 스타 과학자 열풍의 부작용에 시달리는 형국이라는 것. 스타 과학자에만 치중하다 보니 그 외의 다른 과학에는 무심해지게 되고 이런 분위기가 물리학의 위기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해석이다. 생명과학 역시 뜨고 있다고 하지만 생명과학 안에서도 전통적인 분류학이나 생태학은 관심 밖이고 소수 분야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림설명) 대학생도 어려워하는 물리학의 슈뢰딩거 방정식을 술술 읽어낸다는 물리천재 송유근 군. 송 군은 올해 인하대 2학기 수시모집 자연과학계열에 합격했다.

중등교육이 개선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현행 7차 교육과정에서는 과학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필수라고 하지만 교과서 한 권에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이 한데 들어 있다. 내실을 기하기 어렵다. 2학년 때 인문계와 자연계로 나뉘면 인문계 학생들은 그 때부터 아예 과학을 배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연계 학생도 사회탐구영역에 해당하는 과목을 몰라도 상관없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위한 공부만 하게 되는 것이다.





고등학생들은 인문계든 자연계든 과학탐구와 사회탐구에 해당하는 과목들을 모두 제대로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현재로서는 철저히 ‘수능형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한 목소리를 낸다.

김채옥 회장은 “과학을 선택이 아닌 필수 과목으로 만들기 위해 한국물리학회 차원에서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지금 한국의 물리학은 춤추고 싶다. 학생들의 열의를 장단 삼아, 물리학자들의 의지로 추임새를 넣어가며 신명나게 춤판을 벌이고 싶다. 다만 춤판에서도 기존의 춤사위와는 다른 새로운 움직임으로 계속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관객으로부터 진정한 갈채를 이끌어낼 수 있듯 물리학도 저변을 확대해가며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줘야 한다.



대학수학능력시험만을 위한 공부는 이제 그만. 합격한 뒤에는 배웠던 내용을 깡그리 잊어버리기 일쑤다. 중등교육에서 물리를 선택이 아닌 필수로 채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줄기에서 가지를 치다
이미 그런 작업이 여러 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생체의 기작을 분자 수준에서 물리적으로 해석하는 생물물리(biophysics)나 비선형, 통계물리 등의 결과를 경제, 경영 분야에 적용하는 경제물리(econophysics) 등 물리학이라는 줄기에서 여러 개의 가지들이 뻗어 나오고 있다.

물리학이 고대 그리스에서 자연을 연구한다는 ‘physis’에서 기원했고, 18세기까지는 자연의 모든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인 ‘자연철학’과 동일한 말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이제 물리학은 다시 한번 모든 종류의 학문으로 일컬어지던 그 때의 영광과 본질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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