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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 세계선 뭐든 알아서 척척!


몇년 전 ‘나노 바람’이 국내를 한 차례 쓸고 지나갔다. 크기가 조금 작아졌을 뿐인데, 예측할 수 없는 기이한 행동을 보이는 나노 세계에 과학자들은 흥분했다. 당장이라도 나노 로봇이 혈관 속을 돌아다니며 암세포를 파괴하고 신(新) 과학세계의 왕좌를 차지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노 세계는 그리 녹록지 않았다. 추궁하고 들어갈수록 ‘장밋빛 세상’ 대신 ‘불확실한 세상’을 보여주기 일쑤였다. 그래서 요즘 과학자들은 초심으로 돌아갔다. 나노 세계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질서가 뭘까. 지금까지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하나다. 요지경 같은 나노 세계의 밑바닥에는 스스로 ‘헤쳐’‘모여’를 반복하는 나노 입자들이 있다는 것.
나노는 ‘셀프’다.

2005년 7월 1일 미국의 과학전문지‘사이언스’는 창간 125주년을 맞아‘인류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25개를 선정했다. 수수께끼들 중에는 우주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물리학의 법칙은 하나로 통일될 수 있는지, 인간 수명의 한계는 없는지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이 포함됐다. 그리고 18번째 수수께끼로‘화학적 자기조립을 어디까지 추구할 수 있을까?’(How far can we push chemical self-assembly?)라는 다소 생소한 의문이 제기됐다. 자기조립이 뭘까.








유유상종과 자기조립
자기조립은 말 그대로 스스로 조립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우리 몸을 생각해보자. 몸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는 원자다. 원자는 그들 사이의 공유 결합을 통해 분자를 이룬다. 외부에서 인위적인 힘을 가해 원자들이 분자를 이룬 것이 아니라 공유결합이라는 자발적인 반응을 통해 분자가 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자기조립이라고 부른다.

분자는 다시 수소결합, 반데르발스결합, 정전기력 등에 의해 자신들끼리 모여 더 큰분자를 이룬다. 이 역시 자기조립 과정이다. 이들 힘은 공유결합보다 약하지만 집단으로 작용할 때는 공유결합 못지않은 결합력을 발휘한다. 수소결합으로 단일가닥이 이중가닥이 되는 DNA는 이런 자기조립이 일어나는 대표적인 예다.

DNA의 정보(염기서열)를 읽어 3차원 구조를 가진 단백질을 만들고, 이들이 모여 핵을 이루고 세포가 되고, 세포가 모여 조직을 이루고, 조직이 모여 기관을 이루고, 기관이 모여 우리 몸을 이루는 과정이 모두 자기조립인 셈이다. 따라서‘화학적 자기조립을 어디까지 추구할 수 있을까?’라는 수수께끼는‘인간
이 원자와 분자를 자기조립해 생명체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말과 같은 셈이다.





지난 30년간 화학자들은 원자와 분자가 결합하는 과정을 연구해왔다. 그 결과 두 가지 규칙을 알아냈다. 하나는‘유유상종’이다. 일례로 세포를 둘러싼 세포막은 이중층으로 이뤄졌다. 이중층의 구조를 보면 지방(소수성)은 지방끼리, 물(친수성)은 물끼리 맞닿아 있다. 세포는 이런 유유상종의 방법을 써서 세포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고 자신을 보호한다.
두 번째 규칙이 자기조립이다. 원자나 분자는 자기조립을 통해 질서 정연하면서도 복잡한 구조를 마치 마술을 부리듯 아주 간단하게 만든다. 이 규칙만 알아내면 생명체의 비밀을 한 꺼풀 벗겨낼 수 있다.




‘톱다운’기술의 위기
그런데 화학자들이 이런 자기조립 과정을 배우기 위해 부단
히 애쓰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현재로서는 자기조립이 나노 구조를 만드는데 가장 실
질적인 방법이라는 점이다.

대개 분자는 옹스트롬(Å, 1Å=10-10m) 크기다. 분자들 사이의 인력으로 분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분자집합체 즉 초분자를 이루면 나노 크기가 된다. 초분자는 구조에 따라 특정한 기능을 갖기 때문에 초분자를 잘 이용하면 나노 크기의 약물 전달체는 물론 화학 반응 용기, 센서 등 활용 분야가 무궁무진하다.
여기에는 기존의 톱다운(top-down) 방식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위기감도 작용했다.
지금까지는 나노물질을 만들기 위해 큰 것을 깎아 작게 만드는 톱다운 방식을 사용했다. 하지만 크기가 줄어들수록 정확하게 깎아내는 기술이 어려울 뿐 아니라 비용도 많이 든다.




만약 더 작은 물질을 쌓아 나노물질을 만들 수 있다면? 그래서 등장한 방법이 바텀업
(bottom-up) 기술이다. 여기에 물질들이 알아서 정확하게 자기 자리를 찾아가 우리가
일일이 배치하지 않아도 스스로 나노물질로 조립된다면 금상첨화다.
실제로 나노처럼 작은 세계에서는 자기조립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제대로 된 나노 구조체를 만드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나노 크기로 작아지면 원래 갖고 있던 물질의 성질과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다루기가 매우 어렵다.
반도체의 경우 현재 톱다운 방식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좁은 회로 선폭은 40nm다.
선폭이 그보다 좁아지면 전자의 움직임을 제어하기 어렵다. 때문에 얼마 전부터 반도체 연구는 톱다운 방식에서 바텀업 방식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현재는 그 중간 단계다. 바텀업 방식만으로는 40nm보다 작은 선폭의 반도체를 조립할 수 없기 때문에 톱다운 방식으로 일종의 틀을 짜고 이 틀에 나노물질을 집어넣어 반강제적으로 조립되도록 하는 하이브리드 방식이 많이 연구되고 있다.
생명과학자들은 나노메디신 연구에 자기조립을 활용한다.

DNA를 비롯해 세포와 단백질등우리 몸의 생로병사를 조절하는 핵심기관들이모두나노크기이기때문이다. 질병치료에쓰일 DNA나 단백질을 합성해 나노 약물을 만들거나 치료제를 넣고 몸속을 돌아다니는 나노 구조체를 만드는데 자기조립이 활용된다.

컴퓨터과학자들은 DNA의 A-T, G-C 상보결합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이중 가닥을 형성한다는 점에 착안해 DNA라는 생체분자를 정보 처리 프로그램으로 이용하는 DNA 컴퓨터를 개발하고 있다. 실리콘 컴퓨터가 데이터를 처리하고 저장할 때 0과 1로 짜인 알고리즘을 사용한다면 DNA 컴퓨터는 4가지 염기에 데이터를 담고 생체 효소가 데이터를 읽고 처리하는 알고리즘을 사용하는 셈이다.

0102 조지 화이트사이즈 교수는 자기조립을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으로 나눈다. 리보솜, 등방성 기판 위의 얇은 액정 필름, 나노섬유(맨 위에서부터)는 전자(01)의, 세포, 페트리접시 위의 반응-확산 파동, 물고기떼(맨 위에서부터)는 후자(02)의 대표적인 예다.
빛 제어하는 광자결정
자기조립은 나노크기에만 국한된 현상일까? 최근에는 나노 수준에서 이해한 자기조립의 원리를 수mm 크기로 늘리려는 시도가 많다. 분자들은 수소결합, 반데르 발스결합 등 비공유결합으로 나노물질을 형성한다. 하지만 분자의 크기가 커지면 그 모양이나 표면성질, 중력, 자기력, 모세관힘 등의 상호작용이 자기조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자기조립 분야의 선구자인 미국 하버드대 조지 화이트사이즈교수는 10마이크로미터(μm, 1μm=10-6m) 크기의 육각형 튜브를 만든 뒤 튜브의 측면에 소수성 유기물질을 코팅했다. 화이트사이즈 교수는 이 물질 10만개와 소수성 유기물질을 이어주는 접착제를 물에 섞어 주면 이들이 자기조립해 벌집모양의 평판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나노 크기에서 일어나는 자기조립이 그 보다 큰 메조 수준(μm~mm)에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보인 것이다.





최근에는 전도성 메조물질을 자기조립하면 원하는 구조의 3차원 전기회로를 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꼭지가 잘린 정팔면체 모양의 메조물질 표면에 땜납, 전선, 발광소자(LED)를 붙인다. 뜨거운 브롬화산칼륨 수용액에 이 메조물질을 섞으면 표면의 납이 들러붙으면서 3차원 전기회로가 형성된다.
이를 응용하면 메조물질의 물리적인 성질을 그대로 갖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광학적, 전기적인 성질을 지닌 소자를 만들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광자결정(photonic crystal)이다.

광자결정은 굴절률이 다른 물질들이 규칙적으로 쌓여 조립된 3차원 구조체로 특정한 영역의 파장에 해당하는 빛만 완전히 반사시킨다. 이 성질을 이용하면 반도체가 전자의 흐름을 제어하듯 빛의 흐름을 제어할 수 있다.




자연을 모방하라
메조 수준보다 더 큰 m, km 수준에서도 자기조립이 일어날까?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서갑양 교수는 “넓게 보면 자연계의 모든 현상이 자기조립”이라고 설명했다.

밀가루와 물을 섞고 발효제를 넣은 뒤 일정시간이 지나면 빵이 만들어지는 현상도 일종의 자기조립이다. 외부의간섭없이밀가루와물, 발효제의 결합이 자발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개미와 물고기가 일정한 양상을 나타내며 떼를 지어 다니는 현상도, 태양계의 8개 행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일정한 궤도를 그리며 공전하는 현상도 자기조립인 셈이다.

그래서화이트사이즈교수는자기조립을정적인(static)인 것과 동적인(dynamic) 것으로 나눠 설명한다. 원자나 분자 결정처럼 외부 힘이 가해지기 전까지 평형상태가 유지되는 경우를 전자로, 태양계나 은하처럼 끊임없이 변하면서도 일정한 구조가 유지되는 경우를 후자로 보는 것이다.

결국 과학자들이 자기조립의 원리를 찾는 일은 자연을 모방하려는 노력과 맞닿아 있다. 조개껍질이 단단한 이유나 진주가 아름다운 색을 내는 이유, 상어가 빨리 헤엄칠 수 있는 이유나 연꽃잎의 방수능력이 뛰어난 이유를 자기조립 구조에서 찾는 것이다.

이 구조는 열역학적으로 가장 안정된 상태다. 이 구조를 모방할 수 있다면 원자와 분자를 제어하는 방법을 찾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기능이 있으면 구조가 있다’는 믿음으로 과학자들은 자기 조립의 비밀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

| 글 | 이현경 기자 ㆍuneasy75@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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