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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처럼 연결된 초분자


자기조립은 자연계 특히 생명체에서 흔히 발견된다. 대표적인 예가 바이러스다. 바이러스는 유전 정보를 지니고 있는 핵산과 핵산을 감싸는 단백질 껍질로 이뤄져 있다.

단백질 껍질은 바이러스가 세포 속으로 침투할 때까지 자신의 유전 정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데, 속이 빈 캡슐 형태를 하고 있다. 수백 개의 동일한 단백질 단위체가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춘 것처럼 자발적으로 연결돼 수십 나노미터(nm, 1nm=10-9m) 크기의 캡슐을 만든 것이다.

예를 들어 콩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인 CCMV(Cowpea Chlorotic Mottle Virus)는 동일한 단백질 단위체 180개가 자기조립해 지름이 26nm 정도인 단백질 껍질을 갖고 있다. 이 껍질은 CCMV의 유전 정보를 가진 단일 가닥 RNA 3개를 보호한다.




그러면 어떻게 단백질이 자발적으로 모여 공 모양의 껍질을 형성할까? 더구나 어떻게 유전 정보가 담긴 물질을 저장하고 보호하는 창고의 역할을 하는 것일까?
화학자들은 최근에 이르러서야 이런 궁금증에 대한 답을 조금씩 얻고 있지만 아직도 그 원리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여러 개의 동일한 단백질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캡슐(구)의 형태를 이루도록 ‘프로그램’돼 있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테니스공 닮은 초분자공
그러면 어떻게 분자를 설계해야 동일한 분자 여럿이 자발적으로 모여 속이 빈 공을 만들 수 있을까? 이런 문제에 처음으로 접근한 화학자는 미국 스크립스연구소의 줄리우스 리벡 교수다.

1993년 당시 MIT 화학과 교수였던 리벡은 테니스공에서 영감을 얻었다. 테니스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조각 두 개가 모여 공을 형성하고 있다. 리벡 교수는 공 조각을 닮은 간단한 분자를 합성한 뒤 이를 용액에 녹이면 분자가 둘로 나뉜 뒤 스스로 모여 테니스공처럼 구형의 초분자를 이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마치 공의 봉제선을 따라 실로 두 조각을 연결해 테니스공을 만들듯 분자 두 조각은 각자의 말단에 존재하는 산소와 수소의 수소결합을 통해 자발적으로 ‘초분자공’을 이루는 것이다. 초분자공 속은 텅 비어 있는데, 여기에 메탄(CH4) 같은 작은 분자를 가둘 수 있다.


줄리우스 리벡 교수가 1993년 발견한 초분자공인 ‘테니스공’. 자기조립을 이용한 초분자체 연구의 시발점이 됐다.

리벡 교수는 이후 연구를 계속해 좀 더 큰 초분자공을 만들었다. 그는 분자 조각의 크기를 키운 뒤 이들 두 조각을 이어 붙여 내부 공간이 더 큰 초분자공인 ‘소프트볼’과 ‘젤리 도넛’, 위아래로 길쭉한 ‘원통형 캡슐’ 등을 선보였다.

특히 리벡 교수는 자신이 조립한 나노 캡슐 속에서 화학반응을 일으키면 용액에서 화학반응을 일으킬 때보다 반응 속도가 훨씬 빠르고 반응생성물의 형태를 선택하기도 용이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리벡 교수의 연구는 똑같은 단백질 180개가 모여 공을 형성하는 바이러스에 비하면 극히 초보적인 단계지만 분자가 두 개 이상 모여 자발적으로 속 빈 공의 구조를 갖는 초분자체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밝혀 관련 연구를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금속이온 풀로 붙인 육면체
1999년 일본 나고야대 마코토 후지타 교수(현 도쿄대 교수)는 금속이온와 유기물질 사이의 배위결합*을 이용해 나노미터 크기의 캡슐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후지타 교수는 정삼각형 구조를 갖는 유기화합물을 패널로 이용하고 금속이온(Pd2+)을 풀과 같은 접합제로 사용해 패널의 변과 변을 이어 붙여 육면체 구조를 갖는 초분자체를 손쉽게 합성했다. 예를 들어 정삼각형 패널 4개의 변을 이어 붙이면 정사면체가, 6개를 이어붙이면 육면체가, 8개를 이어붙이면 정팔면체가 나오는 식이다.

후지타 교수는 특히 유기화합물의 모양이나 금속이온의 종류를 달리 하면 다양한 크기와 구조를 지닌 캡슐을 합성할 수 있고, 합성된 캡슐 내부는 비어 있기 때문에 그 속에 여러 분자를 동시에 가둘 수 있다는 사실을 보였다. 그는 이 연구를 발전시켜 캡슐 내부의 빈 공간에서 화학반응을 일으키면 용액에서 화학반응을 일으킬 때 얻기 힘든 생성물을 얻을 확률이 높으며, 화학반응에 쓰이는 물질의 상태가 불안정해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합성할 수 없었던 화합물도 캡슐 내부에서 합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를 잘 활용하면 나노캡슐을 나노반응용기로 쓸 수 있다.

* 배위결합
두 원자 사이에 공유되는 전자쌍이 한쪽 원자에서만 나와 이뤄진 공유결합

금속이온을 접합제로 써서 삼각형 패널을 이어붙이면 여러 형태의 다각형이 조립된다. 구리(연두색)와 산소(붉은색)로 이뤄진 육면체(01)와 이를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02). 마코토 후지타 교수는 정삼각형 8개를 붙여 만든 팔면체도 자기조립으로 만들었다(03).
바이러스 모방한 정이십면체
비슷한 시기 미국 유타대 피터 스탱 교수는 두 종류의 분자를 이용해 지름이 7.5nm인 정십이면체(dodecahedron)를 합성했다. 이 조립품은 마치 작은 단백질을 직접 보는 것 같아 당시 학계에서 주목받았다. 스탱 교수는 이 분자를 합성하기 위한 전구체로 두 가지 화합물을 먼저 합성했다. 하나는 삼발이 모양으로 각 다리에 금속과 결합하는 작용기*를 지녔다. 이 화합물은 정십이면체의 꼭지점을 형성할 분자였다. 나머지 하나는 직선 모양으로 말단에 백금 착물*(錯物)이 있었다. 이는 나중에 정십이면체의 변을 형성할 분자였다. 스탱 교수는 이들 두 분자를 상온에서 유기용매에 녹였더니 스스로 20개의 꼭지점과 30개의 면을 갖도록 조립되고 그 결과 지름이 7.5nm인 초 거대분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01 02제리 앳우드 교수가 자기조립으로 최근 합성한 분자들. 이 분자들은 정이십면체와 마찬가지로 대칭구조를 갖고 있다.

한편 미국 미주리대 제리 앳우드 교수는 배위결합을 이용해 끝 부분이 잘린 피라미드 모양을 하고 있는 분자의 측면을 이어주면 정이십면체(icosahedron)의 나노캡슐을 합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끝 부분이 잘린 피라미드 모양의 분자는 피라미드 아랫면에 음전하를 띤 작용기를 지니고 있는데, 이들이 수용액에서 란탄족 금속이온(Ln3+)을 만나면 금속이온이 피라미드 분자의 측면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때 12개의 거대 고리 분자가 모여 지름이 약 2.8nm인 나노캡슐이 되고, 이 나노캡슐은 정이십면체와 아주 유사한 구조를 갖는다. 바이러스의 단백질 껍질이 정이십면체를 기본으로 하는 대칭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고려하면 스탱 교수와 앳우드 교수의 연구 결과는 분자 조각을 주의 깊게 디자인할 경우 자기조립을 통해 얼마든지 특정한 대칭구조를 지닌 바이러스를 모방하고 이들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나노캡슐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셈이다.

* 작용기
기능기, 반응기로도 불린다. 같은 화학적 특성을 지닌 유기화합물들이 있을 때, 이 특성을 나타나게 하는 공통된 원자단을 말한다. 히드록시기(-OH), 알데히드기(-CHO) 등이 있다.

* 착물
하나의 원자나 이온을 중심으로 몇 개의 다른 원자나 이온 분자가 입체적으로 결합한 상태를 말한다.




100nm짜리 캡슐 쿠커비투릴




최근 필자의 연구팀은 ‘쿠커비투릴’이라는 분자의 측면을 이어주면 자발적으로 나노캡슐을 이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쿠커비투릴은 가운데 구멍이 뚫린 원판형 분자인데, 위아래를 잘라내고 속을 긁어낸 호박을 생각하면 된다.

연구팀은 우선 작용기를 여러 개 지닌 쿠커비투릴 분자를 준비했다. 그리고 이들을 서로 이어줄 분자를 용액에 녹이고 자외선을 쪼였다. 그러자 지름이 100nm 정도인 고분자 나노캡슐이 자기조립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아직 어떤 과정을 거쳐 나노캡슐이 형성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원판형의 분자들이 중합반응으로 측면끼리 이어져 2차원의 고분자 조각이 생성되고, 이 고분자 조각이 점점 성장하면서 어느 순간 굽어져 나노캡슐로 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나노캡슐은 쿠커비투릴 분자 약 3000개가 모여 이뤄진다. 나노캡슐 표면에는 분자 크기의 구멍이 무수히 나 있어 이 구멍에 들어맞는 분자를 이용하면 나노캡슐 표면에 원하는 물질을 손쉽게 결합할 수 있다. 이를 활용하면 나노캡슐을 암 치료제로 활용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나노캡슐 표면에 엽산유도체를 결합한다고 하자. 암세포에는 엽산을 인지해 선택적으로 결합하는 수용체가 많이 분포돼 있다. 따라서 엽산유도체가 붙은 나노캡슐은 암세포에 침투하기 쉽고, 나노캡슐 안에 항암제를 넣으면 암세포만 선택적으로 죽이는 표적지향형 약물전달체로 사용할 수 있다.





지난 15년간 화학자들은 자기조립의 원리에 한 발짝 다가섰다. 분자조각을 잘 설계하면 자발적으로 모여 다양한 크기와 모양을 지닌 나노캡슐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이 나노캡슐을 다양한 목적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밝혔다. 하지만 아직 자기조립으로 이뤄진 나노 구조체가 몇 개나 되는지, 나노 입자들을 스스로 움직이게 만드는 공통분모가 뭔지는 모른다. 이런 의문들이 한 꺼풀씩 벗겨질 때 우리는 자연계의 비밀에 조금씩 다가가는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 글 | 이현경 기자, 김기문 포스텍 화학과 교수ㆍuneasy75@donga.com, kkim@postech.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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