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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선총 든‘산화물 해결사’가 떴다!


요즘 전자기기 중에 반도체 메모리가 들어있지 않은 제품이 있을까. 복잡한 컴퓨터는 물론이고 냉장고, 전기밥솥과 같은 일반 가전제품에도 메모리가 들어있다. 메모리는 이미 우리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가장 많이 쓰는 메모리는 D램과 플래시메모리다. 컴퓨터의 주 메모리로 많이 쓰는 D램은 ‘기억상실증’이 있어 일정 시간마다 정보를 다시 저장해줘야 하지만 구조가 단순해 고용량으로 집적하기 쉽다. 반면 플래시메모리는 속도가 느리지만 전원이 꺼져도 정보를 잃지 않아 디지털카메라, MP3플레이어 등에 널리 쓰인다.

과학자들은 플래시메모리와 D램의 장점을 합친 차세대 메모리를 개발하고 있다. 반도체 재료는 이미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를 대체할 새로운 재료가 필요하다. 가장 유력한 대안은 금속산화물. 이 중에는 기존 물리법칙으로 설명하기 힘든 특이한 성질을 가진 물질이 많다.


광 선 총

산화물전자공학연구단을 이끄는 서울대 물리학과 노태원 교수는 “금속산화물은 물리학에서 가장 덜 알려진 분야로 해결해야 할 난제도 많다”고 말했다. 연구단은 레이저 광선을 산화물에 쏴산화물 연구의 여러 난제를 해결하고 있다. 한마디로 광선총을 든 ‘산화물 해결사’인 셈.




F램의 최대 난제 풀다
주목받는 차세대 메모리 F램은 산화물의 일종인 강유전체를 메모리소자로 사용한다. 강유전체란 전류를 흘리면 내부가 양극, 음극으로 갈라진 뒤 전류를 흘리지 않아도 이 상태를 유지하는 물질을 말한다. 마치 건전지가 양극과 음극으로 분리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강유전체가 전기를 띠고 있을 때를 1, 띠지 않을 때를 0으로 정하면 F램에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 강유전체의 성질 덕에 F램은 플래시메모리처럼 전원이 꺼져도 정보가 사라지지 않는다. 또 구조가 단순해 D램처럼 집적하기 쉽다. 그런데 순조롭게 진행되던 F램 연구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F램에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자 일정 회수 이상에서 메모리소자인 강유전체가 자신의 성질을 잃어버리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를 ‘강유전체의 피로현상’이라고 부른다. 이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 어떻게 해결할지 막막했다.

연구단은 강유전체의 피로현상 원인을 산화와 환원의 문제에서 찾았다. 즉 가끔 강유전체에서 산소가 떨어져나가는 현상이 생기는데, 이 때문에 강유전체가 자신의 성질을 잃는다는 말이다. 연구단은 반도체용 신물질 ‘비스무스티타늄산화물’(BTO)로 이 가설을 증명했다.


레이저 광선을 이용해 크리스털 판 위에 산화물을 얇게 쌓는 실험을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연구단은 BTO에서 비스무스 이온 몇 개를 란타늄으로 치환한 ‘란타늄 도핑 비스무스티타늄산화물’(BLT)은 피로현상이 없어져 F램의 소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은 F램의 난제가 풀린 것이다. 노 교수는 이 연구결과를 1999년 ‘네이처’에 발표했다. 이 논문은 지난 10년 동안 발표된 국내 과학자 논문 중 최대인 550회 이상 인용됐다. 현재 BLT를 메모리 소자로 사용하는 F램을 하이닉스사가 개발하고 있다.



‘얇게 쌓기’ 세계 신기록
연구단이 산화물 연구에 주로 사용하는 전략은 ‘겹겹이 얇게 쌓는 방법’이다. BLT도 이 전략으로 만들었다. 산화물을 다양한 조합으로 쌓으면 원래 물질에는 없던 새로운 성질이 생기기도 한다. 산화물을 얇게 쌓기 위해 레이저 광선이 동원된다. 먼저 쌓기 원하는 물질을 곱게 빻아 아주 미세한 가루로 만든다. 쌓기 원하는 대상이 두 가지 이상 물질의 조합이라면 정확한 비율로 섞는다. 빻은 물질은 다시 단단하게 뭉친다.

이렇게 만든 시료에 강력한 레이저 광선을 쏘면 시료의 물질이 플라스마 상태로 바뀌게 된다. 각도를 잘 맞춰 플라스마가 튀어나가는 방향에 크리스털 판을 놓으면 판 위로 산화물층이 얇게 쌓인다. 레이저 광선의 세기와 쏘는 시간을 조절하면 쌓이는 층의 두께를 조절할 수 있다.

연구단은 강유전체를 세계에서 가장 얇게 쌓은 기록을 갖고 있다. 강유전체의 성질을 잃지 않는 한도에서 가장 얇아질 수 있는 한계는 이론적으로 2.4nm(나노미터, 1nm=10-9m)로 알려져 있었지만 누구도 이를 실험으로 증명하지 못했다.

2004년 연구단은 이론적 한계에 근접한 두께 5nm의 강유전체 박막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 전까지 가장 얇은 강유전체 박막은 두께가 고작 수십nm였다. 박막의 두께가 얇을수록 메모리 소자도 작게 만들 수 있어 집적도가 높아진다.






두 얼굴의 ‘다강체’ 만들기
연구단이 최근 주목하고 있는 과제는 ‘다강체’다. 다강체란 양극과 음극으로 갈라진 상태를 유지하는 강유전체의 성질과, N극과 S극으로 갈라진 상태를 유지하는 강자성체의 성질을 모두 가진 물질이다.

한 물체에서 강유전체와 강자성체의 성질이 함께 있으면 뭐가 좋을까. 다강체를 이용하면 전기로 저장하는 D램과 자기로 저장하는 하드디스크의 특성을 공유하는 메모리를 만들 수 있다. 전기로 1과 0을 기록하고, 동시에 자기로 1과 0을 기록하면 집적도는 2배 높아진다. 여기에 전기로 쓰고 자기로 읽거나 반대로 자기로 쓰고 전기로 읽는 식의 다양한 가능성을 시험해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까지 절대영도(-273℃)에 가까운 극저온에서만 다강체가 발견됐다는 점. 연구단은 원자의 결합 모양을 바꿔 이 문제를 풀고 있다. 테르븀망간산화물(TbMnO3)에 레이저 광선을 쏴 크리스털 위에 조심스럽게 쌓아 올리면 원래 직육면체 모양의 테르븀망간산화물을 정육면체로 바꿀 수 있다. 모양이 바뀌면 성질도 바뀐다. 연구단은 모양이 바뀐 테르븀망간산화물이 -173℃ 이상의 온도에서도 다강체 성질을 가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다강체 실용화에 바짝 다가선 것이다.

산화물 해결사의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노 교수는 “공학자들이 어려운 문제를 풀 때 우리 연구가 약간의 실마리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겸손해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약간의 실마리가 아니라 과학계를 뒤흔들 사건이 벌어질지.



레이저 광선으로 산화물을 얇게 쌓기 쌓고자 하는 물질을 빻아 가루로 만든 뒤 다시 뭉친다(01). 레이저 광선을 쏘아 시료를 플라스마 상태로 바꾼 다음 산화물을 만들기 위해 산소를 공급한다(02). 적절한 각도에 크리스털 판을 놓으면 그 표면에 산화물이 얇게 쌓인다(03).
손수 만든 장비로 세계적 성과 거둬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노태원 교수는 자기가 설명을 잘못할 수 있다며 박사과정 학생 한명을 불렀다. 그가 설명하지 못할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지만 직접 연구하는 학생들을 신뢰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도 그는 “좋은 제자들을 만난 덕”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노 교수의 전공은 고체분광학. 1989년 미국 코넬대에서 박사후연구원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우리나라에서 그 분야를 연구하려면 장비를 구하는 것만 평생 걸릴 것”이라는 동료 교수의 말을 듣고 산화물 연구로 방향을 돌렸다. 물론 나름대로 전망도 있었다. 산화물이 기존 재료의 문제를 해결할 돌파구라고 본 것이다.


노태원 교수

당시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연구하는데 쓸 장비가 없어 학생들과 함께 직접 만들었다. 레이저로 산화물을 얇게 쌓는 장비를 만들기 위해 서울 청계천 일대의 기계 상가를 수없이 들락거렸다. 상인들이 학생 한명을 철물점 직원으로 생각했을 정도다. 그때 만든 장비는 모두 3대. 당시 구입한 장비 2대와 함께 무려 13년 동안 ‘네이처’ 같은 세계적인 저널에 실린 연구성과를 내다가 4년 전 퇴역했다. 요즘은 장비를 만들지 않고 구입해 쓴다.

처음에 함께 고생한 학생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노 교수는 “세상이 많이 좋아지긴 했다”라면서도 “요즘 학생들은 ‘헝그리 정신’이 부족한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머리 좋고 창의력도 있지만 연구 도중 문제에 부딪혔을 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는 정신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는 ‘이공계 위기’도 같은 문제라고 본다. 노 교수는 “과학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이 온다면 그 수가 좀 줄어들어도 큰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공계 위기는 양(量)의 문제가 아니라 질(質)의 문제라는 것. 그의 말처럼 과학에 열정을 불태울 이공계 학생들이 많아지길 기대해 본다.

| 글 | 김정훈 기자 ㆍnavikim@donga.com |

산화물전자공학연구단의 연구원들. 연구원들은 가끔 관악산을 오르며 머리를 식힌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단장인 노태원 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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