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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사, 전자코와 한판 승부


불에 탄 소시지 냄새, 차가운 돌과 이끼 냄새, 비릿한 물 냄새와 까마귀의 피 냄새. 일반인은 맡기조차 힘든 냄새를 소설 ‘향수’의 주인공 그르누이는 동물처럼 구별해낸다. 다른 사람과는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내성적이지만 그의 후각은 세상과 거침없이 소통한다. 무언의 냄새만으로도 상대방의 성격과 취향, 행동반경까지 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공식 아래 향수를 제조하는 스승과 달리 영감을 무기로 향기를 빚어내는 그르누이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중의 영혼까지 어루만지는 향수를 만든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아무런 체취도 지니지 못한 채 태어난 그는 천재적인 후각을 이용해 ‘여인의 향기’를 재현하기로 결심한다. 붉은 장미꽃잎과 함께 유리병 속에서 ‘박제’가 된 소녀부터 차가운 기름덩어리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눅눅한 붕대에 감겨 죽어있는 소녀들까지 그르누이가 향기를 얻는 과정은 무모한 희생으로 얼룩졌다. 과연 그는 여인의 체취를 몇 방울의 액체로 담아낼 수 있을까.



아모레퍼시픽기술연구원 향료연구팀 서형제 팀장은 “과거에는 직접 재료를 가공해 만든 천연향료 위주였지만 요즘은 실험실에서 합성향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여인의 향기를 포집해 낱낱이 분석하면 재현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여름 영국 애버딘대와 로담스테드연구소의 과학자들은 가스크로마토그래피를 이용해 인체의 냄새를 만드는 화학성분을 면밀히 분석했다. 그 결과 모기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인체 고유의 냄새분자를 찾아냈고, 이 내용은 지난해 7월 4일 영국 BBC 인터넷판에 실렸다. 가스크로마토그래피는 혼합기체를 분석하는 방법으로 향기를 구성하는 여러 화학성분과 함량을 알아낼 수 있다.




자연의 향기를 향수병 속으로
그르누이가 요즘 태어났다면 무자비한 살인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조향사는 천연향을 실험실에서 재현하기 위해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아모레퍼시픽기술연구원 향료연구팀 홍연주 조향사는 “일단 향기에 대한 이미지가 떠오르면 그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여러 향료를 혼합해 새로운 향수를 만든다”고 말했다.

조향사는 여러 화합물을 섞어 새로운 향기를 만들어내거나 원래 자연에 존재하는 향기를 실험실에서 재현하기도 한다.

자연의 향기를 향수병 속에 담아내는 일도 가능하다. 은은하고 맑은 향으로 예로부터 선비의 사랑을 받았던 난. 특히 추운 겨울에 꽃을 피워 청아한 향기를 내뿜는 제주 한란은 최근 그 개체수가 급격히 줄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지난 2001년 아모레퍼시픽기술연구원은 제주 한란의 향기를 재현해 향수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바람이 불지 않는 온실에서 한란의 향기를 포집해 분석하면 알코올이나 케톤, 알데히드 같은 향을 이루는 화학성분을 알 수 있다. 멸종 위기에 처한 제주 한란의 향기가 조향사의 손을 거치며 영원한 생명을 얻은 셈이다.

소설이 결말에 이를 때쯤 그르누이는 모든 사람을 매혹시키는 향기를 만들어낸다. 어쩌면 이 세상 모든 조향사의 꿈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홍 조향사는 “새로 개발한 향수 품평회를 할 때 10점 만점에 평균점수 5점을 넘기도 어려울 만큼 향에 대한 취향은 다양하다”면서 “냄새에 대한 반응은 각양각색이어서 모든 사람을 매혹시키는 향기는 영화에서나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제주 한란의 향기를 포집해 분석하면 향을 이루는 분자를 찾아낼 수 있다.

1924년 세상에 나와 80년이 넘도록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샤넬의 향수 ‘넘버 파이브’(No.5). 이 향수는 전설적인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가 백야현상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고 합성향료인 알데히드를 실수로 10배나 많이 부어 탄생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향기가 좋아서 이 향수를 사는 사람만큼이나 고급스러운 이미지와 광고에 이끌려 구입하는 사람도 많다. 홍 조향사는 “시중에 나와 있는 향수의 향기가 엇비슷하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향수 자체보다 차라리 브랜드 마케팅에 승부를 거는 편이 현명하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향기는 없지만 ‘브랜드’는 존재하는 걸까.


최근 자신만의 향수를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개인마다 향에 대한 취향이 다른 점도 향수의 종류를 다양화하는데 한몫했다.
냄새 맡는 단백질?
2004년 미국 컬럼비아대 리차드 액설 교수와 프레드 허치슨 암연구센터 린다 벅 연구원은 후각 메커니즘을 밝혀 노벨의학상을 받았다. 이들은 1000개의 후각유전자를 발견했는데, 이는 인간이 갖고 있는 전체 유전자의 3% 정도에 해당한다. 각각의 후각유전자는 냄새를 맡는데 핵심 역할을 하는 후각수용체를 만든다.

충남대 생물학과 김철희 교수는 “시각이 빛의 삼원색을 느끼는 3개의 수용체만으로 모든 색깔을 구별하는 것과 달리 후각은 냄새분자와 결합하는 수용체가 이론적으로 1000개에 이른다”며 “인간보다 후각이 뛰어난 쥐는 1500개의 후각수용체를 갖는다”고 말했다.

냄새를 맡는 과정을 보면 일단 냄새분자가 콧속의 후각상피세포로 들어와 후각수용체와 결합하면서 감각신경을 흥분시킨다. 이때 발생한 전기신호가 뇌로 전달되며 냄새를 느낀다. 뇌는 냄새의 패턴을 저장해뒀다가 나중에 같은 냄새가 나면 기억을 되살린다. 한개의 후각수용체가 여러 종류의 냄새를 담당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인간이 1만 가지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주장도 근거를 얻게 됐다.




서울대 생명화학공학부 박태현 교수는 인간의 후각메커니즘을 인공적으로 재현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인간게놈프로젝트를 통해 후각유전자 가운데 실제로 냄새를 맡는 역할은 375개 유전자가 담당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박 교수는 이러한 핵심 유전자를 인간 세포에서 발현시켜 ‘냄새 맡는 단백질’로 키운 뒤 냄새 분자에 반응하는 정도를 측정하고 있다. 이를 ‘바이오 전자코’라고 부른다.

음식의 냄새를 맡고 신선도를 확인하는 냉장고, 독성물질의 냄새나 마약 냄새를 감지하는 센서, 원하는 향기를 만들어주는 향수 제조기, 냄새로 신분을 확인하는 출입시스템까지 바이오 전자코의 응용분야는 무궁무진하다. 게다가 바이오 전자코는 후각장애를 가진 사람 대신 냄새를 맡고 위험을 미리 알려줄 수도 있다.



‘색맹’보다 괴로운 ‘후맹’
그르누이처럼 타고난 ‘개코’가 있는가 하면 우리 주변에는 아예 냄새를 맡지 못하는 후각소실 환자나 특정 냄새를 맡지 못하는 ‘후맹’도 존재한다. 생식기 발달장애를 불러오는 칼만증후군은 인구 10만명당 1명(남자 기준, 여자는 5만명당 1명) 비율로 발생하는 유전병으로 이 병에 걸리면 뇌의 후각구가 발달하지 않아 선천적으로 냄새를 맡을 수 없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앓고 있는 후맹 역시 평생 자신이 후맹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과학자 존 아무어는 “222명의 실험 참가자에게 맥아 향을 맡게 했더니 36%의 사람이 아무 냄새도 느끼지 못했다”고 1976년 ‘케미컬센스’(Chemical Senses) 저널에 발표했다. 맥아는 맥주의 원료가 되는 보리 낟알로 시큼한 냄새를 내는 ‘이소부틸알데히드’((CH3)2CHCHO)가 주성분이다. 르네이비인후과 양경헌 원장은 “장미 향기나 맥아 냄새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후맹 환자의 경우 그 냄새를 실어 나르는 후각수용체가 선천적으로 없거나 부족할 확률이 크다”고 설명했다.

갑자기 입맛이 떨어지거나 냄새가 잘 느껴지지 않아 병원을 찾는 사람들은 후천적으로 후각을 잃은 경우에 속한다. 후각역치검사나 후각인지검사를 한 뒤 문제의 원인을 찾는데, 후각역치검사는 알코올의 한 종류인 부탄올(C4H8OH)을 희석해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최저 농도가 어느 단계인지 측정한다. 후각인지검사는 친숙한 냄새를 맡으며 어떤 물질의 냄새인지 알아맞혀야 하는데, 전체 냄새의 80% 이상 맞히면 정상이다.




비염이나 축농증의 경우 냄새분자가 후각점막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후각이 떨어지지만, 코 안의 염증을 치료하거나 수술을 받으면 후각을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머리에 충격을 받아 뇌의 후각구나 코의 신경세포가 손상된 환자는 치료하기가 쉽지 않다. 건국대 의대 이비인후과 홍석찬 교수는 “사고로 머리를 다치면서 냄새를 못 맡게 된 경우 드물게는 몇년 뒤 신경이 다시 이어지며 후각이 되돌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로는 후각을 잃은 환자를 위한 근본적인 치료법은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불이 나거나 가스가 새도 냄새를 맡지 못하고, 음식이 상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따라서 집에는 화재경보장치나 가스감지장치를 설치해야 하고 음식의 유통기한을 늘 확인하는 식으로 적응해야 한다. 사시사철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셈이다. 여러 향기를 조합해 새로운 향기를 만들어내는 조향사와 그 향기를 낱낱이 분석해 바이오 전자코를 개발하는 과학자. 이들의 수많은 시도와 연구 성과가 차곡차곡 쌓이면 언젠가는 후각을 잃은 사람이 다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 글 | 신방실 기자 ㆍweezer@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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