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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이 여는 질병 치료 르네상스

백신의 무한도전
‘백신맨’이 업그레이드돼 돌아왔다. 천연두, 말라리아 같은 전염병을 잡는 전문가였던 백신맨이
이번엔 암, 비만, 알츠하이머 같은 만성질병까지 잡으려고 한다. 이뿐 아니다. 2000만명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독감 같은 슈퍼독감의 등장에 대비해 바이러스의 아킬레스건을 찾고 있다.
‘백신의 무한도전’ 속에 카멜레온 같은 바이러스가 설 곳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300년 전, 인류의 평균 수명은 20살 정도였다. 18세기 말 산업혁명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하루 15시간 이상 노동에 시달렸고 위생상태도 나빴다. 이 때문에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백신과 항생제가 등장한 뒤 수명이 급격히 늘었다. 박테리아는 주로 항생제가, 바이러스는 주로 백신이 처리했다. 21세기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78.5세다. 300년 전보다 4배 정도 늘어난 셈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수명이 늘면서 암이나 심혈관질환 같은 비전염성 질환이 문제가 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2020년까지 비전염성 질병이 전세계 질병목록의 60%를 채울 것으로 전망했을 정도다. 비전염성 질병은 신체노화나 잘못된 식습관, 생활습관이 누적된 결과로 일단 발병하면 고치기 어렵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전염병 퇴치에 큰 활약을 했던 백신이 만성질병을 치료하는 쪽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어 희망이 보인다.

최근 암, 알츠하이머, 비만을 치료하는 백신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백신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과학자들은 16세기 유럽에서 중세 암흑기가 끝나고 그리스 문예를 부흥시키던 운동에 빗대 21세기를 ‘백신의 르네상스’라 부른다.




내부의 적과 싸워라
인체는 폐쇄적인 사회와 비슷하다. 각자 맡은바 역할을 하는 제 식구는 감싸지만, 이방인은 공격해 무력화시킨다. 이방인을 방치하면 정교한 인체 시스템이 붕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체라는 폐쇄사회를 유지하는 체계가 바로 면역계다. 핵심은 ‘나’와 ‘남’을 구별하는 것.

남을 만나면 없애거나 인상착의(항원)를 인식해(항체 생성) 보관해둔다. 훗날 다시 만나면 바로 잡아들일 수 있도록 채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 만난 자가 너무 강하면 항체를 만들 시간이 없어 한방의 공격에 무너질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일종의 가짜병균으로 면역반응을 유도하는데, 이것이 백신이다.

몸 구성원이 제 역할을 다하면 ‘폐쇄적인 사회’도 잘 돌아간다. 그러나 구성원에 문제가 생기면 속수무책이다. 이방인만 관리하는 면역계는 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구성원 가운데 하나인 ‘아밀로이드-β’ 단백질이 뇌혈관에 많이 쌓여 알츠하이머병에 걸려도 몸은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세포에 이상이 생겨 몸에 해를 끼치는 상황까지 이르렀는데도 말이다.

이럴 때 몸이 고유단백질에 대한 항체는 못 만들지만, 외부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항체는 만든다는 사실을 이용하는 전략은 어떨까. 외부바이러스가 고유단백질을 만들도록 디자인하거나 고유단백질의 모양과 비슷한 펩티드를 디자인해 백신으로 맞는다. 몸은 바이러스가 침입한다고 생각해 항체를 만드는데, 그 항체가 바로 인체 고유단백질의 항체가 된다.

1997년 12월, 인도의 한 어린이가 소아마비 예방백신을 먹고 있다. 예방백신은 나중에 진짜 소아마비 바이러스에 감염됐을 때 항체를 만들어 병에 걸리지 않도록 몸을 보호한다.



1997년 12월, 인도의 한 어린이가 소아마비 예방백신을 먹고 있다. 예방백신은 나중에 진짜 소아마비 바이러스에 감염됐을 때 항체를 만들어 병에 걸리지 않도록 몸을 보호한다.

면역계를 속이려면 면역계가 인지할 수 있는 ‘위험신호’(danger signal)가 필요하다. 바이러스에 포함된 리피드A 같은 면역보조물질이 위험신호 역할을 한다.
면역보조물질이 없다면 인체는 고유단백질을 포함한 바이러스를 그냥 고유단백질로 인식해 항체를 만들지 않는다. 위험신호를 준 뒤 항체를 만들면, ‘말썽’을 일으키는 고유단백질에 붙어 힘을 빼놓거나 제거한다.
기존의 예방백신이 ‘적과의 싸움’이라면 만성질병 치료백신은 질병을 일으키는 인체 내 세포를 공격할 항체를 만드는 ‘자신과의 싸움’인 셈이다.







면역계 활성화시키는 암치료 백신
암세포는 다른 세포에 비해 빠른 속도로 증식한다. 암세포가 생기면 일단 백혈구와 NK세포(natural killer cell)가 암세포를 공격한다. 이 둘은 인체에 이상한 세포가 들어오면 무조건 공격하는 1차 방어선이다. 그런데 암세포가 늘어 이 둘이 감당할 수 없게 되면서부터가 문제다. 면역계는 암이 고유세포이기 때문에 스스로 암 항원에 대항하는 항체를 만들지 않는다. 정교한 사회를 갉아먹는 암세포를 제 식구처럼 껴안은 인체는 결국 ‘자신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른다.

반대로 면역계를 활성화시키면 암을 치료할 수 있다. 서울대 약대 강창율 교수는 몸속 림프조직이나 혈액 속에 있는 ‘B 세포’를 이용해 면역 기능을 높이면 암세포를 효과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 암 관련 최고 학술지인 ‘캔서 리서치’ 7월호에 발표했다.


비만인 쥐의 간세포. 지방 세포(붉은색)가 간세포(연한 분홍색)에 비해 많다.

암세포 표면에는 일반세포에는 없는 단백질이 있어 항원으로 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유방암이나 난소암에는 Her-2/neu 항원이, 췌장암이나 위암, 폐암에는 ‘CEA’(carcinoembryonic antigen) 항원이 많다. 이 물질들이 암백신의 표적이 된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암백신 임상시험은 100개 이상. 미국 머크사도 폐암백신인 ‘스티뮤백스’(Stimuvax)를 곧 임상시험할 계획이다. 이 백신은 폐암세포 표면에 있는 ‘MUC-1’화합물을 공격하는 원리다. 강 교수는 “임상시험을 마치고 효과가 좋은 암치료백신이 탄생하기까지 10년도 안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암을 치료할 때 백신을 사용하면 어떤 점이 유리할까. 암세포는 증식속도가 빠른 것이 특징인데, 기존의 항암제는 증식속도가 빠른 세포를 모두 암세포라 생각해 공격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 머리카락이 빠지고 피부색도 변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또 치료를 받던 환자의 몸이 약해지면 항암치료를 중단할 수밖에 없어 사망할 때도 있다.

치료백신은 몸이 항체를 만들어 면역계를 견고히 다지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암세포를 공격하는 것은 환자의 몸이 만든 항체다. 특정 암세포만 골라서 공격하므로 부작용이 적다. 항암제가 직접공격이라면 치료백신은 간접공격인 셈이다.


비만 백신을 맞은 뒤의 간세포. 지방 세포(붉은색)가 백신을 맞기 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
5년 안에 백신으로 비만 치료
이뿐 아니다. 최근 비만, 알츠하이머병, 니코틴 중독까지 백신 연구영역이 늘고 있다.
미국 스크립스 연구소는 최근 20년 동안 미국에서 비만 청소년의 비율이 3배나 늘었나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체중을 줄이려면 식이요법과 운동이 최선책이지만 의지가 약하거나 고도비만 환자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때 ‘제니칼’ 같은 다이어트 약이 시판돼 인기를 끌었다. 대장에서 지방의 흡수를 막아 살을 빼는 원리다. 그런데 이 약품은 배에 힘을 약간만 줘도 설사(지방변)를 하고 복용을 멈추면 요요현상이 생겨 문제가 됐다.

앞으로는 부작용과 요요현상 없이 비만을 다스릴 수 있는 백신이 나올 전망이다. 세계적으로 비만백신은 2종류가 개발되고 있다. 하나는 한양대 생명과학부 김효준 교수가 개발한 비만백신이다. 지방을 몸속 각 조직으로 실어 나르는 운반체인 저밀도지질단백질*이나 초저밀도지질단백질*등이 조직에 지방을 축적하는 과정에 관여하는 아포리포프로테인 B-100(apolipop -rotein B-100) 단백질의 작용을 막는 비만 치료백신이다. 그는 “앞으로 5년 안에 백신을 맞아 비만을 치료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비만인 사람은 당뇨나 심혈관계 질병에 걸릴 위험이 높다. 그런데 다이어트를 과도하게 하면 건강을 해칠 위험이 크다. 최근 부작용 없이 몸의 면역반응을 이용해 비만을 치료하는 백신 개발이 한창이다.

식욕을 느끼지 못하도록 조절하는 백신도 있다. 미국 스크립스 연구소가 2006년 8월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한 바에 따르면 식사 전에 위벽에서 분비돼 식욕을 일으키는 단백질인 그렐린(ghrelin)에 대항하는 항체를 만들면 식욕을 느끼지 못해 음식 섭취량도 줄고 살이 찌지 않는다. ‘기아 호르몬’이라는 별칭이 말해주듯, 그렐린에 항체가 붙어 기능이 저하된다. 그런데 이 백신은 동물(쥐)에겐 효과가 있었지만 임상 3상에서 사람에게 효과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현재 뇌에서 그렐린 수용체를 항체로 막는 방법으로 선회해 제품을 개발 중이다.

치매는 현재 마땅한 치료방법이 없어 한번 걸리면 가족 모두가 고통을 겪는 질병이다. 일본 국립장수의료센터연구소의 다비라 다케시 박사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뇌에 아밀로이드-β 단백질이 쌓인다는 사실에 주목해 백신을 개발하고 있다.

다케시 박사는 바이러스에 아밀로이드-β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를 삽입했다. 사람이 백신을 먹으면 아밀로이드-β 단백질에 대한 항체가 생겨 아밀로이드-β 단백질이 축적되지 못하고 분해된다. 다케시 박사팀은 동물 실험에 성공했으며 2007년 안에 임상시험에 들어갈 예정이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왼쪽)은 퇴임 뒤 미국 국민에게 고별편지를 썼다. 편지에는 자신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수백만 명의 미국인 가운데 한명이 됐다는 고백과 함께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있었다.

치료하기 어렵기로는 흡연도 예외가 아니다. 금연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어도 뇌는 니코틴의 자극을 기억하고 있어 담배를 끊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백신으로 니코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 전망이다.
면역계가 니코틴을 공격해 니코틴이 뇌에 전달되지 않도록 돕는다. 흡연을 해도 담배를 피우는 느낌이 들지 않는 셈이다. 따라서 금연을 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금연패치나 껌, 사탕 등으로 욕구를 억지로 참을 필요 없이, 백신을 맞아 손쉽게 금연할 수 있다.

백신이 질병 치료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몸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면역계를 활성화시켜 질병을 치료하는 방향으로 백신의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실제로 시장정보기관인 미국 글로벌 인더스트리 애널리스츠사는 지난 7월 공개한 ‘휴먼 백신: 글로벌 사업전략 보고서’에서 만성질병 치료백신 시장 규모는 2010년 33억 달러(약 3조 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예방용 백신 분야가 2007년 116억 달러의 시장규모를 형성할 것으로 예측한 것보다는 작은 수치지만 치료용 백신의 연구기간이 짧은 것에 비하면 시장규모가 급속도로 커지고 있는 셈이다. 다국적 제약회사인 머크사나 노바티스 등이 치료백신 분야에 뛰어드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질병 치료의 르네상스를 여는 치료백신의 성장이 기대된다.


저밀도지질단백질
지질단백질 중 콜레스테롤 함량이 가장 높고 혈관 벽에 붙어 동맥경화증을 일으킨다.

초저밀도지질단백질
간에서 합성돼 혈액으로 분비되며 저밀도지질단백질을 만든다.

| 글 | 목정민 기자 ㆍloveeach@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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