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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기억을 채집하다


지난해 12월 발생한 원유 유출 사고로 태안반도는 검은 기름에 잠겼다. 굴과 전복이 떼죽음을 당했고 기름 냄새 풍기는 점농어와 넙치, 우럭은 땅에 묻혔다. 수십 년간 이곳에서 나는 수산물은 먹을 수 없을 거란 얘기가 돌았다.

그러나 지금 태안에서는 물에 뜬 기름덩어리와 함께 희망을 건져 올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손에 손을 맞잡은 자원봉사자와 방제전문가, 생물영향평가를 하기 위해 모인 과학자의 노력이 모이며 태안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고 있다.

“만리포 4km.”
이정표 속 숫자가 줄어들수록 가슴은 먹먹해졌다. 지난 12월 11일 충남 태안 일대에는 봄날 마냥 포근한 햇살이 쏟아졌다. 나른한 졸음이 몰려올 만큼 평화로운 정오. 하지만 정적을 깬 것은 지독하게 밀려오는 검은 기름 냄새였다.

“허리에 파스 몇 장을 붙였는지 몰라요. 하지만 어떡하겠어요. 가까운 이웃인데 도와야지.”
새벽부터 적십자 회원 서른 명과 함께 충남 보령에서 올라왔다는 최은주 씨는 허리 한번 펼 틈 없이 기름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최 씨가 해안에서 바가지로 퍼담은 기름은 양동이에 모인 뒤 자원봉사자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달됐다. ‘저렇게 느린 속도로 언제 기름을 모두 걷어낼까’라는 생각은 섣부른 착각이었다. 한 바가지의 기름이 거대한 ‘인간띠’를 거치며 한곳에 모이자 금세 수 톤에 이르렀다. 한국해양오염방제조합의 폐기물 수거차량은 폐유를 실어 나르느라 엔진이 식을 틈도 없었다.



폐사한 굴과 전복 찾아 삼만리
하루 전날 밤 급히 연구 장비를 챙겨 태안으로 향한 한국해양연구원(이하 해양연) 임운혁 박사. 해양연 남해연구소가 위치한 거제도에서 만리포까지 320km 먼 길을 왔다. 갑자기 지난 1995년 여수 씨프린스호의 악몽이 스쳐지나갔다. 당시 제3호 태풍 ‘페이’의 영향으로 파도가 거세 현장에 접근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기름 잔류물질이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던 임 박사는 발만 동동 구르다 결국 한참이 지나서야 현장조사에 나설 수 있었다고 했다.

“훗날 유출된 기름이 얼마나 정화됐는지 알기 위해서는 ‘대조군’ 격인 현장의 초기시료가 필요합니다. 기름을 뒤집어쓴 가리비나 폐사한 물고기, 모래와 진흙도 사고의 기록을 담고 있는 소중한 자료죠.”

해양경찰청의 해양오염사고 현황을 보면 2002년부터 5년간 발생한 크고 작은 기름 유출 사고는 모두 1598건에 이르고, 무려 3571㎘의 기름이 바다로 퍼져나갔다. 2007년 상반기만 해도 153건의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했다. 해상운송이 활발해질수록 해양오염사고가 일어날 위험도 커지지만 아직 적극적인 예방책은 부족한 현실이다. 특히 유출된 기름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는 일은 수십 년이 걸리는 고된 작업이다.

12월 11일 과학동아 취재진이 태안을 찾은 날 유럽우주국(ESA)의 지구관측위성인 엔비샛(Envisat)은 우주에서 태안반도를 내려다봤다. 태안반도 주위로 퍼진 기름띠(원안)가 레이더영상에 선명하게 보인다.

이른 아침부터 임 박사팀은 바다로 나갔다. 일단 해안을 따라 이동하며 현장의 상태를 파악했다. 시커멓게 변한 모래를 퍼 가져온 병에 담고 기름 피해를 입은 수산물이 없는지 어촌계에 수소문했다. 다행히(?) 파도리의 양식장에서 연락이 왔다. 기름이 덕지덕지 붙은 굴과 전복을 어민에게 받아 소중히 아이스박스에 넣었다. 이 시료를 분석하면 PAH(다환방향족탄화수소) 같은 독성물질이 얼마나 축적됐는지 알 수 있다. 값을 치르겠다고 하자 어민은 다 내다버릴 걸 뭐 하러 그러냐며 손사래를 쳤다. 잔뜩 쌓여있는 굴 껍데기 위로 무거운 한숨이 쏟아졌다.


퍼 담고 또 퍼 담아도 끝없이 밀려오는 검은 기름띠. 허리 한번 펼 틈 없이 기름 제거작업에 나선 자원봉사자들의 이마에 어느새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기름 냄새는 어떤 성분일까
“원유 속에는 아연, 철, 바나듐 같은 중금속과 나프텐산, 페놀 같은 유해물질이 포함돼있습니다. 아연과 철은 몸에도 미량 존재하는 원소라 직접적 피해는 적지만 휘발성물질인 페놀은 치명적인 발암물질이죠. 오랫동안 인체에 누적되면 기관지염이나 기관지폐렴 같은 호흡기장애를 불러오고 각종 암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점심 무렵 만리포에 도착한 세종대 지구환경과학과 김기현 교수의 말이다. 임 박사의 ‘SOS’를 받고 현장에 달려온 김 교수는 악취분석 전문가다. 일단 바다를 덮고 있는 기름띠 위에서 공기를 채취해 플라스틱 백에 담았다. 초속 5~10m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악취성분이 희석될 것을 고려해 해안 근처의 퇴적물도 여러 개의 병에 나눠 담았다. 병에서는 어느새 코를 찌르는 냄새가 풍겼다.

한곳에 오랫동안 쪼그리고 앉아 기름 냄새에 노출될 경우 처음에는 역겹지만 금방 그 냄새에 익숙해진다. 그러나 집에 돌아간 뒤 두통에 시달리고 메스꺼움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만리포의 한림대 성심병원 의료지원단에는 허리 통증뿐만 아니라 피부 발진, 기침, 구토, 편두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았다. 마스크조차 쓰지 않고 작업하면 더 위험할 수 있다. 김 교수는 “기름 제거작업을 하는 동안 수시로 오염현장에서 벗어나 맑은 공기를 쐬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온몸이 기름으로 얼룩진 자원봉사자들. 한참을 쉬지 않고 작업하면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목과 피부가 따가운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같은 시간 만리포의 모래와 진흙을 뒤지고 있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 바로 안산에 있는 해양연 본원에서 내려온 해양바이오신소재연구사업단의 권개경 연구원과 대양열대해역연구사업단의 노재훈 박사. 권 연구원은 기름 성분을 정화하는 미생물을 연구 중이다. 보통 기름유출사고가 일어나면 오일펜스와 흡착포, 유화제를 이용해 1차 방제를 진행한 뒤 미생물을 이용해 2차 방제를 시도한다. 권 연구원은 “바지락과 토양 샘플을 분석해 초기 오염상태를 파악하면 이를 분해할 수 있는 미생물로 2차 방제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열대바다에 사는 플랑크톤을 연구하는 노 박사는 “플랑크톤은 굴이나 조개보다 기름 유출사고의 피해를 덜 받는 편이지만 플랑크톤을 먹는 다른 물고기에까지 연쇄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해양 먹이사슬이 깨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곧 이들은 양식장이 밀집한 근소만으로 이동했다.



보호용 안경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기름 제거 작업에 나서야 두통이나 구토, 피부발진 같은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




과학자들의 끝없는 만리포 사랑
서해안의 아름다운 낙조를 뒤로한 채 임 박사팀은 급히 의항리로 향했다. 바닷가에는 광어, 우럭, 넙치, 점농어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한 어민은 “지난 일요일에 잡은 물고기를 서울 가락동 수산물시장에 올려 보냈는데, 거절당하고 돌아왔다”고 말했다.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의 해안가. 서울 가락동 수산물시장에서 거절 당해 폐기한 물고기 가운데 점농어를 한 어민이 들어보였다.

임 박사는 즉시 간이실험대를 바닥에 차렸다. 물고기 서너 마리씩을 어종별로 분류하고 길이와 무게를 재더니 능숙하게 메스를 잡고 해부하기 시작했다. 어류생리학을 전공한 해양연 정지현 박사가 핀셋으로 물고기의 배에서 집어낸 것은 조그만 쓸개.

“어류가 기름에 노출되면 사람과 마찬가지로 간에서 독성분해효소를 분비하며 쓸개즙을 배출합니다. 쓸개즙 속 대사물질 분비량을 분석하면 물고기가 기름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알 수 있죠.”





정 박사의 말이다. 쓸개 시료 29개를 채취하자 어느덧 주위가 깜깜해졌다.
이날 과학자들이 만리포를 찾은 까닭은 단순히 기름 오염현장을 연구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굳은 사명감이 없었다면 어촌계의 전화번호를 뒤져 피해지역을 찾아다니고 가능한 많은 양의 시료를 확보하기 위해 태안반도를 샅샅이 누빌 수 없었을 것이다. 지난 여수 사고 현장에서는 초기시료를 확보하지 못해 생물체에 남아있는 유류 독성물질을 연구하는 데 애를 먹었다. 시간이 가며 물고기 몸 안에 체류하던 사고의 ‘기억’이 차츰 옅어진 탓이었다.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이들은 추운 날씨를 견딜 수 있었다. 기름오염 피해의 과학적 증거를 찾을 때까지 이들의 ‘만리포 사랑’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편집자 주
지난 12월 7일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최악의 원유 유출 사고가 발생했다. 해상 크레인이 정박 중이던 홍콩 선적 유조선과 충돌하면서 유조선의 기름탱크에서 원유 1만2547㎘가 유출된 것. 사고 발생 닷새째인 12월 11일 사고현장인 만리포를 찾았다.

과학자들은 만리포의 모래를 병에 담고 굴과 전복 그리고 오염된 공기까지 채집했다. 기름 오염 현장의 작은 단서라도 생물영향평가를
할 때 소중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기름에 오염된 태안 만리포에서 채집한 토양에서 발암물질인 벤젠계열 화합물과 기관지염을 일으키는 PAH(다환방향족탄화수소), PCB(폴리염화비페닐) 같은 유해오염물질이 다량 검출됐다.

세종대 김기현 교수는 “지난 12월 11일 만리포에서 채집한 토양에서 공기 중으로 배출되는 성분을 분석하자 총탄화수소(THC)의 양이 20~60ppm에 이르렀다”며 “이는 대규모 공장지대의 THC 기준인 50ppm과 비교해도 굉장히 높은 수치”라고 같은 달 13일 발표했다. THC는 대기오염을 측정하는 지표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애초 언론이 문제 삼았던 벤젠과 톨루엔은 거의 검출되지 않았다. 김 교수는 그 까닭을 “이번 사고 때 유출된 기름이 정제되지 않은 원유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원유의 주성분은 탄소와 수소로 이뤄진 탄화수소로 긴 사슬모양의 분자구조를 갖는다. 원유를 온도와 압력을 증가시키며 정제하면 분자사슬이 끊어지면서 고리모양의 탄화수소가 된다. 이때 끓는점의 차이에 의해 LPG, 가솔린, 등유, 경유로 분리된다.

벤젠, 톨루엔은 탄소수가 각각 6, 7개인 고리모양 탄화수소로 원유가 아닌 정제유에 많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이번 사고에서 벤젠과 톨루엔이 고농도로 검출되지 않은 것. 대신 벤젠보다 탄소 수가 더 많은 데칸(C10H22), 벤젠계열 화합물로 역시 유독오염물질인 1,3,5-트리메틸벤젠(C9H12) 등이 다량 검출됐다.

반면 만리포 오염현장에서 채집한 대기시료를 분석하자 탄화수소의 양이 거의 0에 가까웠다. 김 교수는 “거센 바람 탓에 확산이 일어나며 기름의 냄새를 이루는 물질이 모두 날아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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