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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건 8할이 그분

“기회는 적극적으로 찾는 사람에게 와요”
“고3 초에 시작했던 교수님과의 멘토링은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 중 하나랍니다. 모니터 앞에 앉아 망설이며 키보드를 두드리던 일이 이렇게 큰 경험을 가져올 줄은 몰랐어요.”

지금은 미국 코넬대 3학년생인 정수연 양은 WISE 웹사이트에서 이화여대 수학과 이혜숙 교수를 자신의 멘토로 신청하던 때를 회고했다. 서울과학고를 다녔던 수연 양은 여학생이나 여교사가 별로 없어 답답했고 점점 흥미를 느끼던 수학을 앞으로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WISE의 문을 두드렸던 것.

이 교수는 “그때 금융뿐 아니라 정보기술이나 생명과학에서도 수학이 있어야 해결될 문제가 많다고 알려줬다”며 “여학생을 위한 여러 특강을 듣거나 WATCH21* 같은 연구프로그램에 참여하라고 추천했다”고 말했다.

수연 양은 이화여대 대학원생 선배들과 함께 WATCH21 암호팀을 구성했고 암호팀은 독창성 있는 알고리즘을 개발한 덕분에 350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산업자원부장관상을 받았다. 그는 “암호팀에서 수학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았고 연구과정에서 수학에 대한 열정을 쏟으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 뒤에는 암호팀 지도교수의 소개로, 수학 분야에서 권위 있는 상인 풀커슨 상을 받은 마이크로소프트(MS)연구소 김정한 박사의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수연 양은 학부 해외유학을 가기로 마음먹고 있었는데, 학교 성적 이외에 다른 활동이나 경력이 필요했다. 이미 국내 수학올림피아드에서 상을 받았고 키보드를 치며 밴드부 활동도 했던 그에게 WISE 멘토링은 미국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명문대인 코넬대로 유학을 떠날 수 있는 날개가 됐다.

“팀워크를 발휘하며 받았던 산자부장관상이라는 큰 상도 코넬대에서 입학허가를 받는 데 도움이 됐지만 사실 여성도 좋은 외국대학에 유학 갈 수 있다고 격려하며 넓은 세계를 보여주신 이 교수님의 멘토링이 큰 힘이 됐어요. 물론 교수님의 추천서도 큰 도움이 됐죠.” 하지만 어려움도 있었다. 외국대학에서 입학허가를 받더라도 장학금을 받지 못할 경우 3남매 중 장녀인 그가 집안에 부담을 주면서 유학 가기 힘든 상황이었다. 수연 양은 이 교수의 도움을 받아 대통령장학금을 비롯해 다양한 장학금에 도전했다. 마침내 포스코 산하 ‘베세머상 수상기념재단’에서 지원하는 장학생으로 선발돼 1년에 학비, 생활비를 포함한 4만 달러씩 4년간 받게 됐다.





현재 수연 양은 코넬대 물리학과 줄리아 톰 교수 밑에서 반도체를 이용해 입체적으로 소립자를 검출할 수 있는 ‘3D 픽셀 검출기’를 개발하는 데 참여하고 있다. 또 코넬대에서 총장연구장학생(CPRS)으로 선정돼 연구비를 지원받으며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다. 지난 겨울 한국에 잠깐 들어왔을 때도 고등과학원(KIAS)과 서울대가 공동 진행한 ‘물리 겨울캠프’에 참여하는 열의를 보였다.

“수학이 많이 쓰이는 물리도 흥미로워요. 올해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 가서 연구하고 싶어요. 대학원에서는 생명체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물리적으로 설명하는 생물물리를 이론적으로 공부할까 생각해요.”
아이비리그에 당당히 입성해 장학금을 받고 전 세계를 누비며 연구하는 수연 양은 후배 이공계 알파걸의 멘토인 셈이다.

WATCH21*
여자 대학(원)생, 여고생이 한 팀을 이뤄 공동 연구하는 과정에서 리더십을 키워주고 우수 여성이공계인을 길러내기 위한 사업.

WISE 온라인 멘토링
WISE 웹사이트(www.wise.or.kr)에 접속해 회원 가입을 하고 멘토링을 신청하면 이공계에서 진학, 진로, 취업 등의 주제에 대해 도움을 주는 든든한 후원자(멘토)를 만날 수 있다. 정수연 양처럼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WISE 멘토링 사이트는 확실한 정보와 기회를
제공한다.





“직업 현장의 목소리, 이제 후배에게 전해요”
수학자, 나노물리학자, 약사, 보건학자….
성균관대 약대 4학년 강희원 양이 중학생 때부터 적어낸 장래희망 목록이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희원 양은 방학 때 대전 KAIST에서 영재교육을 받았다. 왕복 5시간이 넘는 시간을 들일 정도로 열정적인 학생이었다. 당시 수업을 받으면서 여러 번 꿈을 바꿨다. 수학영재교육을 받을 땐 수학자를 꿈꾸고, 물리영재교육을 받을 땐 나노물리학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다양한 꿈을 꾸는 희원 양은 현재 성균관대 약학과에 재학중이다. 대학을 졸업하면 약사가 될 수 있지만 희원 양의 꿈은 약사가 아니다. 다른 진로를 찾고 싶던 차에 부광약품 품질관리팀 최소희 부팀장을 만나 가능성을 찾았다. 그는 충북대 약대를 졸업한 뒤 11년 동안 제약회사 약품품질관리 분야에서 일해 왔다.

두 사람은 한 통의 e메일로 인연을 맺었다. 희원 양은 지난해 6월 포르투갈에서 열리는 국제헬스케어심포지엄 참여 여부를 고민했다. 2006년 미국에서 열린 국제약대학생연합동아리(IPSF)에서 만난 친구가 추천한 행사다. 일반인에게 약의 올바른 사용법을 어떻게 알릴지 고민하는 장이다. 희원 양은 보건약학의 해외 동향도 알 수 있을 것 같아 학교 수업에 빠지고서라도 심포지엄에 참가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심포지엄 기간이 기말고사 기간과 겹쳐 성적이 떨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희원 양은 고민 끝에 최 부팀장을 찾았다. 멘토링으로 인연을 맺은 지 채 한 달이 안 됐을 때였다.




꿈을 위해 전진하는 희원 양에게 감동받은 최 부팀장은 교수에게 사전 동의를 구하면 출석도 인정되면서 심포지엄에도 참가할 수 있다는 조언과 함께 비행기삯을 지원해주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이때부터 멘토-멘티 관계가 영글었다.

사실 희원 양은 고등학교 때까지 꿈이 많았지만 약대에 진학한 뒤 슬럼프에 빠졌다. 세심함을 요구하는 약학이 적성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한때 전과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 부팀장은 “약학을 전공한다해서 모두 약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득했다. 희원 양은 의약 마케팅, 제약회사 연구원 등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진로선택의 안목을 넓혔다.

일단 수많은 약학 과목 가운데 무엇을 중점적으로 공부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때 최 부팀장이 ‘현장의 목소리’를 들려줬다. 그는 제약회사는 약제학을 전공한 인재를 원하므로 약제학 분야에서 이론뿐 아니라 실험과목까지 섭렵하라고 조언했다.





멘토링 효과를 톡톡히 본 희원 양은 자신이 배운 내용을 이제 후배들과 나누고 있다. 그와 연결된 멘티는 수원중의 윤진남 양, 울산성광여고의 주지은 양, 춘천여고의 문혜린 양이다. 거리가 멀어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e메일로 공부 노하우, 대학 정보, 전공 정보 등을 소상히 전해주고 있다. 희원 양은 “후배들은 고민을 덜 하고 좋은 길을 택했으면 한다”며 “친언니 같은 멘토가 되고 싶다”고 전했다. 희원 양이 멘토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모습도 최 부팀장의 멘토링 덕분일까. 인터뷰 중간에 틈날 때마다 약학 연구원이 쓰는 기구를 하나라도 더 설명해주려는 최 부팀장과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희원양의 표정에서 멘토링으로 이어진 따뜻한 끈을 엿볼 수 있었다.

중간멘토
중간멘토는 멘티로 활동하면서 동시에 멘토의 역할을 맡는다. 멘티는 자신보다 저학년에게 멘토로서 조언을 해줄 수도 있다. 멘토와 멘티로 촘촘히 연결된 여성네트워크를 지향하는 와이즈(WISE)의 전략 프로그램 중 하나다.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해양과학자의 꿈 키워요”
“바다를 좋아하고 바다의 무궁무진한 비밀을 캐고 싶은 저는 해양과학자가 꿈입니다. 그 길은 고되고 험난해서 많은 사람들이 가길 꺼려합니다. 하지만 제가 해양과학을 공부한다면 뒤따라올 누군가를 위해 울퉁불퉁한 길을 잘 포장하고 싶습니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여고생이 단상에 나가 당찬 포부를 말했다. 주인공은 지난해 2월 이화여대에서 열린 제1회 WISE 전국여고생연구발표대회에서 ‘나의 꿈 나의 미래’라는 주제로 발표한 의정부여고 3학년 최은주 양.

그 자리에 있던 신라대 생물과학과 고현숙 교수는 은주 양에게 첫눈에 반했고 주저 없이 ‘러브콜’을 보냈다. 당시 은주 양은 WISE 경기센터 소속이었고 고 교수는 WISE 부산·경남지역센터에 속한 여성 과학자였다. 그러나 게와 새우, 가재처럼 다리가 10개인 십각류를 연구하는 고 교수는 해양과학자를 꿈꾸는 여학생을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지난해 은주 양은 고 교수의 초대로 두 번의 값진 경험을 했다. 5월에는 부산에서 대마도까지 국립수산과학원의 연구선인 ‘탐구1호’를 타고 항해하는 해양선상캠프에 참가했다. 심해에서 끌어올린 물을 손으로 만지며 수심이 깊어질수록 바닷물의 온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느꼈다. 해저 밑바닥의 진흙을 퍼올려 저서생물을 찾아냈고, 작은 플랑크톤부터 오징어, 병어, 자동차 타이어만한 불가사리까지 다양한 해양생물을 채집했다. 첫날은 뱃멀미 때문에 고생했지만 선상 위의 생생한 체험 덕분에 해양과학자의 꿈을 단단히 다질 수 있었다.

9월에는 제주도 성산일출봉으로 스킨스쿠버캠프를 갔다. 처음에는 잠수복을 입는 데에만 30분이 걸렸다. 고 교수에게 수영을 배울 때는 무거운 오리발 때문에 발목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스쿠버 장비를 매고 들어간 바다 속 풍경은 상상을 초월했다.

“거미 불가사리와 빨간 성게, 문어, 혹돔처럼 맛있게 먹기만 했던 물고기들이 살아서 헤엄치고 있었어요. 그 순간 수심 7m의 바다가 두렵기보다는 포근하게 안아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죠. 마치 엄마 품처럼.”

제주도 출신인 고 교수는 어려서부터 바다와 더불어 살았고 자연스레 해양생물을 연구하게 됐다. 하지만 해양생물학자가 된 뒤 힘든 고비도 많았다. 임신 7개월 때도 억척스럽게 채집을 나갔고 제주도 현무암에서 미끄러지며 갈비뼈를 다치기도 했다. 서른아홉의 나이에 스쿠버다이빙을 배우는 일도 녹록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고 교수는 어린 은주 양의 꿈이 해양과학자라는 사실이 기특하기만 하다. 스쿠버다이빙을 가르쳐준 것도 은주 양에게 가능한 많은 경험의 기회를 주고 싶어서였다.





고 교수는 해양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곰처럼 단순하고 우직한 편이 좋다고 조언한다. 뜨거운 태양, 거센 파도와 싸우고 히드라와 해파리의 독도 이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양생물을 ‘횟감’이 아닌 연구대상으로 진지하게 관찰하는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 더해진다면 금상첨화다. 바다만 보면 가슴이 벌렁거리는 환상의 커플은 기나긴 동면을 끝내고 이제 서서히 바다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원거리 멘토링
“가재는 게 편인 것 알지? 힘들어도 파이팅!” “교수님 스쿠버다이빙하실 때 감기 조심하세요(^-^)”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만날 수 없는 고 교수와 은주 양은 휴대전화 메시지와 e메일을 주고 받으며 마음을 전한다.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 1년에 한두 번이기에 그 만남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미래는 기술융합시대 실감했어요”
“6주라는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그때 보고 들은 경험은 그 뒤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놓았습니다.”
지난해 여름 국가핵융합연구소에서 멘토링을 가진 뒤 6개월 만에 연구소를 찾는다는 건국대 신소재공학과 4학년 박주현 양은 대전행 KTX 차내에서 당시를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당시 3학년이던 주현 양은 ‘이 공부를 계속해야 할까?’라는 의문에 답을 찾으려고 고민하고 있었다.

WISE의 멘토링 인턴십 과정에 지원한 주현 양은 멘토에게 가르침도 받으면서 인턴으로 일하며 돈도 벌 수 있는 흔치않은 기회를 경험했다. 처음으로 가족을 떠나 대전으로 내려와 연구소 기숙사에 머물며 6주 동안 생활했다. 주현 양이 배치된 곳은 미래전략연구그룹 파워플랜트시스템연구팀. 2040~50년경 상용화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핵융합발전소를 가장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 국내외 정보를 모으고 분석해 청사진을 내놓는 곳이었다.




“그래, 이제 4학년인데 진로는 어떻게 할 거니?”
주현 양의 고민을 알고 있던 미래전략연구그룹 그룹장인 한정훈 박사는 인사를 마치자 ‘멘토’답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전공을 살려 대학원에 들어갈까 해요.”
재료공학자가 되겠다는 대답에 한 박사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미래전략연구그룹을 이끌고 있는 한 박사는 WISE가 멘토링 프로그램 참여를 부탁했을 때 흔쾌히 수락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갈수록 이공계를 기피하고 이공계 대학생조차 전공을 못 살리는 게 결국은 이공계 업무 현장을 경험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명이라도 미래에 대해 올바른 시각을 갖게 도와줄 수 있다면 보람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박사는 주현 양을 사무실 잡무를 떠맡기는 인턴으로 생각하지 않고 팀의 일원으로서 핵융합 프로젝트에 대한 전반적인 안목을 갖추도록 배려했다. 특히 팀 회의는 가능한 참석하도록 했다. 앞으로는 혼자 똑똑한 사람보다 남들과 같이 일할 수 있는 소양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회사는 맡은 일만 하는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분들이 열정적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걸 깨달았습니다.”
핵융합 연구를 하는 나라들의 핵융합플랜트 관련 최신 연구현황과 연구기관 자료들을 업데이트하고 정리하는 업무를 했던 주현 양은 수천도의 열과 고에너지 중성자의 충격을 견딜 수 있는 핵융합로 구조재료의 신소재를 개발하는 게 핵융합 실용화의 핵심이라는 사실도 발견했다.





“학교에서 책으로만 공부할 때는 도대체 이런 내용들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멘토링 경험으로 미래는 여러 분야의 전문지식이 합쳐져야 결과가 나오는 기술융합의 시대라는 걸 실감했죠.”
주현 양 옆에서 흐뭇하게 지켜보던 한 박사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진흙속의 진주”라며 “멘토링 같은 프로그램이 이들에게 ‘동기부여’를 해줄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게 없다”고 말했다.

남성 멘토
WISE의 멘토링 프로그램은 이공계 여성전문인과 여학생을 이어주기 때문에 등록된 남성 멘토는 없다. 그러나 학생이 인턴으로 현장에 파견될 경우 책임자가 멘토 역할을 하기 때문에 남성일 경우가 있다. 한 박사를 비롯해 질병관리본부 조인호 박사와 윤기정 연구원도 남성 멘토로 활약했다.

| 글 | 이충환, 목정민, 신방실, 강석기 기자 ㆍcosmos@donga.com, loveeach@donga.com, weezer@donga.com, sukki@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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