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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패션’ 시대 열렸다


영국의 저명한 동물행동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인간을 ‘털 없는 원숭이’로 정의했다.
인간의 연약한 피부를 수천 년 동안 보호해줬던 건 다름 아닌 목화솜이나 누에고치, 양모에서 뽑은 천연섬유였다. 하지만 20세기 최대 발명품으로 꼽히는 나일론 같은 화학섬유의 등장으로 천연섬유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옛것에 대한 향수일까. 최근 천연섬유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패션계에서는 웰빙을 대표하는 확실한 트렌드로, 산업계에서는 자연에서 생분해되는 최첨단 바이오플라스틱 소재로 뜨는 걸 보면 단순한 그리움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천연섬유의 화려한 변신에 주목해보자.



패션업계 에코(Eco) 열풍
패션업계에 ‘녹색 바람’이 불고 있다.
건강과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유기농 목화나 옥수수, 콩 같은 천연재료로 만든 옷이 새로운 패션 트렌드로 떠오른 것.
패션 리더들이여, 자연을 입어라!

3100% 유기농 면으로 만든 청바지, 쐐기풀로 만든 앞치마, 대나무 섬유로 만든 재킷에 옥수수로 만든 티셔츠까지….
패션업계에 ‘에코(Eco) 열풍’이 거세다.
그동안 소규모 의류업체가 실험적으로 내놓던 다양한 천연섬유 소재 의류가 최근 패션업계의 ‘블루오션’으로 떠오른 것.
2007년 영국의 디자이너 아냐 힌드마치가 “I'm not a Plastic Bag(나는 플라스틱 가방이 아니랍니다)”이라는 슬로건을 넣어 만든 면소재 가방 ‘에코백’이 폭발적 인기를 모으면서 에코패션 열풍은 확실한 패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한국패션협회는 지난해 12월 말 발표한 ‘2008 패션산업 10대 뉴스’ 가운데 하나로 ‘에코 패션 붐’을 선정하며, 피부자극이 없는 다양한 친환경 소재가 패션시장을 주도했다고 평가했다. 패션 리더들이 천연섬유 의류를 ‘머스트 해브’(must have) 아이템으로 선택한 이유는 뭘까.


2007년 영국의 디자이너 아냐 힌드마치가 디자인한 ‘에코백’은 패션업계에 ‘에코패션’ 붐을 몰고왔다

인류 최초의 옷이라면 아담과 이브의 중요한 부분을 가려 준 나뭇잎일까?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인류 최초의 옷이 초목의 잎이나 동물의 모피였을 것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 뒤 초목의 잎이나 모피에서 섬유를 분리하고 여기서 실을 뽑아 엮어서 천을 만들었다.

인류가 언제부터 섬유로 만든 옷을 입기 시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스위스 드웰러 호수에서 발굴된 마직물과 인도 인더스 강변에서 발견된 면직물이 신석기 시대 유물로 밝혀지면서, 학자들은 인류가 적어도 5000~1만 년 전부터 천연섬유로 만든 옷을 입었다고 추측한다.

의복재료로 사용하는 천연섬유는 크게 면이나 모시 같이 식물에서 얻는 식물성 섬유와 양모나 실크 같이 동물에서 얻는 동물성 섬유 두 가지로 나눈다. 이들 섬유의 화학성분이 각각 셀룰로오스와 단백질이기 때문에 셀룰로오스 섬유와 단백질 섬유로 나누기도 한다.

실크의 원료인 누에고치 실크는 대표적인 동물성 섬유다

천연섬유는 수 천년 동안 인류의 피부를 보호하고 멋스러움을 강조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하지만 1889년 프랑스의 일레르 샤르도네 백작이 질산셀룰로오스 섬유로 최초의 인조섬유인 레이온을 개발하고, 그로부터 50년 뒤인 1938년 미국의 화학자 월러스 캐러더스가 최초의 합성섬유인 나일론을 발명하면서 천연섬유는 큰 타격을 받았다.

나일론이 면의 뛰어난 땀 흡수성이나 실크의 부드러운 촉감을 단번에 따라잡을 수는 없었지만, 실크의 외관이나 기능을 닮은 폴리에스테르섬유나 양모를 모방한 뉴워스티드, 면의 촉감을 닮은 드라이 쿨터치 소재가 등장하며 천연섬유 생산량이 크게 줄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70년만 해도 천연섬유는 세계 섬유 총 생산량의 62%를 차지했지만 1990년대 초 화학섬유 생산량에 추월당했다. 2007년 현재 천연섬유 생산량은 전체의 40%가 채 안되며, 나머지 60%를 화학섬유가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합성섬유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 가는 듯 보였던 천연섬유가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천연섬유생산량이 2000~2007년 동안 연평균 3.5%로 1995~2000년 기간 평균인 1.2%보다 높아졌다. 천연섬유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 준 건 21세기 사회의 핵심 코드로 등장한 ‘웰빙’이다.

웰빙은 육체적·정신적 건강의 조화 속에서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소비 유형이나 문화를 일컫는 말이다. 고기 대신 생선과 유기농산물을 즐기고, 단전호흡이나 요가 같은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운동을 하며 삶의 균형을 찾는 ‘웰빙족’에게 천연섬유는 ‘입는 웰빙’으로 다가왔다.

천연섬유는 특정한 계절에만 생산이 가능하고, 기후와 날씨에 따라 품질이 크게 달라지며, 섬유 고유성질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천연섬유는 주성분인 셀룰로오스의 수산기(-OH)가 물과 결합하는 성질을 갖고 있어, 땀 흡수가 잘되며 피부를 건조하지 않게 유지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1938년 최초의 합성섬유인 나일론으로 만든 스타킹을 신고 있는 여성. 당시 언론은 나일론이 실크스타킹을 완전히 대체할 거라고 떠들었다.
웰빙과 로하스, 천연섬유 ‘컴백’을 돕다
웰빙에 이어 등장한 ‘로하스’(LOHAS, Life-styles of Health & Sustainability) 운동은 천연섬유 소재의 폭을 넓히는데 큰 역할을 했다. 로하스는 2000년 미국의 내추럴 마케팅 연구소가 처음 사용한 말로 ‘건강과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뜻한다. 웰빙의 개념이 개인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면, 로하스는 너와 나, 모두, 그리고 후손까지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방식으로 ‘사회적 웰빙’이라고도 한다.

석유를 주원료로 하는 합성섬유는 제조와 폐기과정에서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고, 자연에서 생분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천연섬유는 제조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덜 발생시키고, 버려진 옷은 생분해돼 자연으로 돌아가 친환경적이다.
친환경 의복 소재로 인기를 끌고 있는 옥수수섬유는 옥수수에서 유산(lactic acid)을 얻고 이를 고분자로 합성해 만든다.

또 땅에 묻으면 적절한 온도와 수분 상태만 주어지면, 미생물에 의해 4주안에 완전히 분해된다. 게다가 폴리에스테르섬유와 비교해도 광택과 촉감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최근에는 옥수수섬유와 더불어 콩에서 추출한 단백질로 만든 콩섬유, 대나무에서 추출한 셀룰로오스로 만든 대나무섬유도 에코패션 시장을 주도하는 인기 천연섬유 대열에 합류했다.











1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조화 속에서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웰빙’은 천연섬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2옥수수섬유로 만든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한 모델. 옥수수섬유는 폴리에스테르섬유와 비교해 광택과 촉감이 뒤지지 않으면서도, 매립했을 때 2~3년 안에 생분해된다
2009년은 세계 천연섬유의 해
에코패션 붐은 올해도 계속될 전망이다.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는 지난해 말 해외 10개국의 연말시즌 구매동향을 분석해 만든 ‘미리 보는 2009년 소비트렌드’ 보고서에서 글로벌 소비 키워드로 ‘3E’, 즉 ‘실속’(Economical), ‘가치’(Essential), ‘환경’(Environmental)을 꼽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캐나다 소비자는 친환경 제품에 10%의 추가 비용을 부담할 용의가 있다.
다음 세대에 아름다운 지구를 물려줘야할 책임과 의무에 대한 공감대가 만들어지고 있는 지금,
환경문제가 사람들의 소비 패턴에 중요한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는 얘기다.
2009년은 UN이 정한 ‘세계 천연섬유의 해’다.
천연섬유로 만든 옷으로 나와 지구의 웰빙을 함께 가꿔보는 건 어떨까.






대표적인 천연섬유 4종


실용적이고 위생적인 면
목화솜에서 얻는 셀룰로오스가 주성분인 식물성 섬유다.
면섬유의 단면을 살펴보면 평편한 관 모양이고 중앙에 구멍이 있으며 측면은 리본 모양으로 꼬여있다.
면섬유는 셀룰로오스의 수산기(-OH)가 물과 결합하는 성질이 있어 피부의 땀이나 오염물을 빨리 흡수해 입으면 쾌적하며, 정전기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최근에는 면화의 색을 결정하는 유전자를 조작해 만든 갈색이나 녹색을 띠는 천연착색면화가 등장해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천연착색면화는 화학염료를 사용하는 염색공정이 없기 때문에 피부에 자극을 주지 않는 친환경 무공해 섬유다.



여름철에는 시원한 마
주성분은 식물 세포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다당류 셀룰로오스이며,
단위섬유가 천연접착제인 펙틴으로 결합돼 섬유다발 형태를 이루는 식물성 섬유다.
식물의 종류에 따라 아마에서 얻는 린넨, 저마에서 얻는 모시, 대마에서 얻는 삼베로 나뉜다.

섬유질이 두꺼워 거칠고 빳빳하지만 면과 마찬가지로 수분을 잘 흡수한다.
촉감이 시원하기 때문에 여름철 의복에 좋지만,
물세탁을 하면 섬유다발이 분해돼 빳빳한 성질이 사라지므로 드라이크리닝을 하는 것이 좋다.




엄마 품 같이 따뜻한 양모
면양의 털에서 뽑는 동물성 섬유로 케라틴 단백질로 이뤄졌다.
면양의 털에는 라놀린이라는 양모기름이 엉켜있는데, 이를 정련해 양모섬유를 얻는다.
이때 부산물로 나오는 라놀린 기름은 보습효과가 뛰어나 화장품 원료로 사용된다.
주성분인 케라틴 단백질이 나선형으로 꼬여 있어 탄성이 좋고 변형에 대한 회복이 빠르다.
구김이 있는 옷에 물을 뿌린 뒤 하룻밤이 지나면 구김이 사라지는 이유다.
곱슬곱슬하게 휘어 있는 양모는 섬유 속 빈 공간에 공기가 많아 따뜻하며,
수분을 흡수한 뒤 이를 증발시키는 성질이 좋아 항상 쾌적하다.



‘섬유의 여왕’ 견(실크)
누에가 만든 누에고치에서 뽑는 동물성 섬유. 섬유 표면에 미세한 구멍이 많아 수분을 흡수하는 성질이 면보다 높으며 염색성이 좋다. 따라서 촉감이 부드럽고 광택이 우아해 한복감, 드레스, 스카프, 넥타이 같은 고급스러운 패션소재로 많이 쓰인다.

하지만 열에 약하므로 다림질에 유의해야 한다.
또 백색 견섬유는 직사광선을 쬐면 견섬유를 이루는 티로신이 산화돼 누런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그늘에서 건조시켜야 한다.
견섬유끼리 부딪히면 ‘사각사각’하는 경쾌한 소리(견명)가 난다



INTERVIEW_“쐐기풀 드레스 한번 입어 보실래요?”
서울 정릉에 있는 한 연립주택 3층. ‘대지를 위한 바느질’이라는 작은 팻말이 붙은 문을 열자 16m2 남짓한 공간에 각종 원단이 가득하다. 몇 해 전부터 옥수수 드레스나 쐐기풀 환자복 같은 천연섬유 의복을 디자인하며 ‘그린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경재 씨를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쐐기풀 원단으로 앞치마를 만들고 있었어요. 쐐기풀은 인류가 최초로 옷을 만들어 입을 때부터 사용했던 천연소재죠. 쐐기풀 원단은 튼튼하고 항균성도 뛰어나요.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생산과정에서 화학 살충제와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고 땅에 묻으면 썩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에요.”

자신의 소개가 끝나기가 무섭게 이 씨는 ‘쐐기풀 예찬’을 늘어놨다. 그는 지난 해 3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서울 휴먼영상의학센터 병원에 쐐기풀로 만든 환자복을 공급했다. 기존 병원복은 면과 폴리에스테르 합성원단을 사용하는데, 피부질환과 발암성 논란까지 일고 있는 형광증백제가 사용된 경우도 있었다.

그린디자이너 이경재



평범한 패션 디자이너였던 그가 천연섬유 소재에 처음 눈을 돌린 때는 2005년 국민대 그린디자인대학원 재학 시절 우리나라 그린디자이너 1세대로 꼽히는 윤호섭 교수의 수업 시간에서였다.
윤 교수는 학생들에게 반투명 비닐 같은 옥수수 전분 원단을 한 조각 씩 나눠주며, 이 소재로 무엇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보라고 했다.

촉감이나 광택이 뛰어난데다가 옥수수 전분이라 생분해된다는 사실에 착안해 웨딩드레스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결혼식 예복은 보통 실크와 합성섬유인 폴리에스테르로 만든다. 그런데 폴리에스테르는 땅에 묻어도 썩지 않고, 실크는 고가의 수입원단인 경우가 많아 가격이 매우 비싸다.

 




2006년 9월 서울 논현동 T-스페이스에서 개인 전시회를 열어 옥수수 전분 섬유로 만든 드레스를 처음 전시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옥수수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하겠다는 사람도 나타났다.

이들을 위해 한 두 벌씩 천연섬유 드레스를 만들기 시작한 일이 계기가 돼 지금까지 ‘에코 드레스’라는 사이트(www.ecodress.net)를 운영하며 총 9쌍의 결혼식에 옥수수나 쐐기풀로 만든 드레스를 제공했다. 지난해 환경영화제 개막식 때 사회를 맡은 최윤영 아나운서가 입은 옥수수 전분 드레스도 그가 디자인했다.

이 씨는 최근 웰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천연섬유가 의복 소재로 인기를 끌고 있는 사실을 반가워하면서도, 사람들의 관심이 아직 ‘인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아쉬워했다.
“3년 동안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목화로 만든 유기농 면이 인기에요. 화학물질을 사용하지 않은 유기농 면이 우리 몸에 좋다는 인식 때문이죠. 하지만 유럽이나 일본에서는 유기농 면을 ‘지구를 살리는 소재’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현재 전 세계 살충제의 25%와 농약의 10% 이상이 면화 재배에 쓰이고 있는데, 이를 줄여 환경을 보호하자는 취지지요.”
이 씨는 쐐기풀로 만든 원단에 멸종동물 그림으로 얼룩덜룩한 위장 무늬를 만든 ‘친환경 군복’도 만들고 있다. 올해 UN평화유지군에 이를 전달할 예정이다.

“그동안 패션 디자이너는 자신이 만든 옷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만 신경을 썼어요. 하지만 이제는 생산부터 폐기 과정까지 자신이 디자인한 옷이 사회와 자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민할 때에요. 과학의 사회적 책임을 고민하는 과학자와 닮지 않았나요?”







이경재씨가 쐐기풀 섬유로 만든 드레스를 손질하고 있다.


그린디자이너 이경재
2004년 국민대 의상디자인학과 졸업
2006년 국회의원회관 친환경상품전 초청전시, T-스페이스 친환경 드레스 개인전시회
2008년 국민대 디자인대학원 그린디자인 전공 졸업



한양대 의류학과 이정순 교수
이정순 교수는 한양대 의류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의류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충남대 의류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다양한 의류소재에 대한 감성과 성능을 평가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 글 | 이정순 충남대 의류학과 교수 ㆍjungsoon@cnu.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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