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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의 블랙박스 ‘전자연구노트’ 정착 될까

가격·보안·호환성 등 걸림돌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연구원들이 실험일지를 인터넷에 기록을 남기는 ‘전자 연구노트 제도’를 도입해 운영한다고 17일 밝혔다. 실험의 전 과정을 꼼꼼히 담는 연구노트 제도는 2007년 도입돼 정부출연연구기관 연구자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는 개념. 제도의 시행 자체는 그리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기록을 전자화했다는 점에서 새롭다.







연구자가 실험과정을 기록하는 전자연구노트제도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비싼 도입 비용과 보안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연구노트 제도를 도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적지 않다. 순수기초연구성과의 경우엔 연구노트가 첨부되면 실험의 공신력도 높아진다. 실험실 사고나 논문조작 의혹 등이 제기될 경우 증거 자료로도 활용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과학기술자들은 연구노트 제도에 대해 ‘원론적으로 찬성’이라고 밝혀왔다. 그러나 시행방법에 대해서는 기관별로 다른 방법을 채택하고 있어 현장연구자들과 관리부처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정부출연연구기관에 다니는 한 연구원은 “누구나 컴퓨터로 일하는데, 그날 일이 다 끝나면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다시 노트를 정리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면서 “정부에서 시스템이 하나로 통일된 전자연구노트 제도를 정착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공책에 적을 것인가, 컴퓨터에 입력할 것인가?


몇 해 전 대전 대덕연구개발특구의 한 과학자는 외국 학술논문지에 자신의 연구성과를 발표하려다가 곤란을 겪었다. ‘손으로 작성한 연구성과를 신용하기 어려우니 공신력 있는 검증자료와 함께 다시 제출해 달라’고 요청받았기 때문이다. 그 과학자는 결국 적잖은 비용을 들여 자신이 직접 관리하던 연구노트를 컴퓨터 데이터베이스(DB)로 형태로 바꿨다. 전자연구노트 자료를 첨부하면 외국 저널에서 큰 문제 삼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연구노트는 크게 손으로 공책 등에 적는 ‘수기연구노트’와 컴퓨터를 이용해 전산망에 즉시 기재하는 ‘전자연구노트’ 형태로 나뉜다. 정부 지침에는 어떤 형태로든 연구노트를 작성하기만 하면 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전자노트 도입은 이미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는 의견이 과학계 내에서 힘을 얻고 있다.

국내에 연구노트 기재가 의무화된 것은 교육과학기술부(전 과학기술부)가 ‘국가연구개발사업 연구노트 관리지침’을 2007년 말 발표한 이후부터다. 이 지침은 지난해 7월 일부 개정을 거쳐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연구기관별로 수기노트 혹은 전자노트 중 한 가지를 선택해 운용하면 된다.

지침에 따르면 작성된 연구노트는 해당 기관에서 보관하며, 문제가 생길 경우는 원내 윤리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공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수기노트는 종이에 기재하는 형태를 따르다 보니 다양한 제약도 따른다. 지침에 따르면 수기 연구노트는 30년 이상 보관하게 되어 있으며, 따라서 종이의 질도 우수한 것을 사용해야 한다. 수정이 가능한 필기구(연필 등)를 사용할 수 없으며, 임의로 1~2페이지 등을 추가하거나 빼지 못하도록 제본된 노트를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기관명이나 일련번호, 과제명, 기록한 날짜, 기록·점검자의 서명 등 기본적인 사항도 모두 적어 넣어야 한다.

전자노트의 경우도 제약조건은 마찬가지지만 이용이 한결 편리하다. 단순한 사항들은 자동입력이 가능해 그날의 업무내역만 인터넷 상에서 적으면 된다. 전자연구노트의 추가 규정이 있는데, 기록자와 점검자의 서명 인증기능, 연구기록 입력일과 시간이 자동 기록되는 기능, 입력기록을 수정하면 영구적으로 수정내용이 표시되는 기능 등을 갖추도록 돼 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은 연구자가 직접 신경쓰지 않아도 자동으로 입력되도록 제작할 수 있어 사용상 불편을 겪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 출연연의 연구노트 관리부서 담당자는 “전자연구노트가 더 관리하기 편하고, 수기노트에 비해 오히려 공신력도 높다”며 “다만 높은 도입 단가나 보안문제 등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동아사이언스는 대덕연구개발특구를 비롯한 정부출연연구기관을 대상으로 취재한 결과 대부분의 기관이 2007년 이후 연구노트제도를 운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지금은 수기노트를 작성하고 있지만 전자노트를 도입했으면 좋겠다”는 입장이 많았다.






취재결과 원자력연 이외에 아직까지 전자연구노트 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 운영하고 있는 기관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에 연구노트에 적어 이 파일을 보관하는 형태의 원시적(?)인 전자연구노트 제도를 운영하는 기업연구소는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등이 연구기관이 2007년부터 수기연구노트 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며, 차후 전자연구노트 도입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한국화학연구원, 한국한의학연구원 등이 2007년 교과부 지침 이전부터 수기연구노트를 작성해 왔으며, 아직까지 전자연구노트 도입 계획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허청서 앞장서서 보급… 올해 시범사업 통해 4개 기관 지원


정부차원에서도 전자연구노트 활용을 장려하고 있으며, 담당업무는 특허청이 맡고 있다. 전자노트가 국제특허분쟁의 경우에도 중요한 근거자료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허분쟁에서 수기로 된 자료를 근거로 제출하려면 찢어지지 않아야 하고 해당 문서가 다른 문서와 함께 묶여 있어야 하는 등 제한요건이 많다. 특허청은 전자연구노트가 활성화된다면 분쟁 발생시에 쉽게 증빙할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허청은 개발 중인 프로그램을 ‘전자발명일지(e-note)’란 이름으로 보급할 예정이다. 작년 말 시험판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현재 시범보급 사업을 벌이고 있다. 개선사항 등을 확인해 올해 안에 정식 버전을 내놓을 예정이다. 시범사업에 당첨되면 1개 기관마다 1억 원씩 프로그램 구입 가격을 지원받게 된다. 올해에는 지난 4월 대학 2곳(경상대, KAIST)과 출연연 2곳(표준연, 생명연)이 선정됐다.

특허청 산하 한국특허정보원의 이진구 과장은 “시범사업은 앞으로 5년 동안 실시될 예정으로 출연연과 대학 등 공공기관은 50개 기관까지 확대할 방침”이라며 “기업 연구소도 2011년까지 32개를 선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자연구노트가 보편화 되면 특허관리, 연구개발 등이 목적으로 과학자들의 연구노트 내용 중 일부 정보는 네트워크 상에서 자유롭게 공유하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연구성과의 평가, 연구보고서 등을 작성하는 수고도 함께 줄어들며, 어떤 연구소에서 어떤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지 여부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특허청 역시 이런 공유 기능을 추가했다. 연구노트시스템은 각 기관의 서버에서 직접 관리하되, 한국특허정보원은 각 연구노트의 제목과 생성된 시점만 전송받아 공증하는 시스템으로 운용하는 형태다.

특허청 전자연구노트 담당 공무원은 “연구기관에서 독자적으로 전자연구노트를 개발, 운영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정보공유 시스템 만큼은 통일되길 바란다”면서 “특허청 프로그램의 소스코드 일부를 공개하는 형식으로 개발자들을 지원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연구자가 실험과정을 온라인에 기록하는 전자연구노트 중 하나인 ‘전자발명일지’실행화면. 사진 제공 한국특허정보원


수억원대 비용이 도입 걸림돌… 보안성 우려도 한 몫


정부의 설명대로 이처럼 기능이 좋은 전자노트가 연구자들에게 주목받고 있지 못하는 까닭은 뭘까. 먼저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점이다.

한국한의학연구원은 지난해 여름에 대전 지역 벤처기업인 ‘한국R&D프로젝트연구소’의 전자노트 프로그램을 구입해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수억대에 달하는 견적 때문에 결국 도입 계획을 전면 취소했다. 당시 제시된 가격은 외국산 전자연구노트 시스템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외국시스템을 도입할 경우 라이센스 가격 등이 포함돼 가격이 30억원을 호가한다. 대부분의 연구기관이 성능이나 안전성이 검증된 외국산 전자노트 도입을 꺼리는 이유다.

출연연의 한 관계자는 “수기연구노트를 지금까지 잘 활용해 왔는데 갑자기 수억원을 들여 전자연구노트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엔 부담이 된다. 잘못하면 ‘세금낭비’로 지적받을 만한 사항으로 비춰질 수 있다”면서 “정부연구기관인 만큼 전자화 된 연구노트 정도는 중앙부처에서 무상으로 제작, 보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허청에서 제작한 프로그램도 결코 값 싸지는 않다. 아직 정확한 가격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민간기업인 R&D프로젝트연구소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 연구소 담당자의 설명. 또 연구소 내부 정보시스템 등과 연동하려면 프로그램의 수정, 보완 역시 불가피 한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한 출연연의 책임급 박사는 “재차 프로그램을 수정, 보완 하는데 드는 비용도 적지 않을 것 같다”고 밝혔다.






현장 과학자들이 ‘전자화’된 기록물을 불신하는 것도 제도 도입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연구노트에는 과학자의 실험내용, 아이디어, 실험결과 등이 모두 적혀 있어 자신의 모든 연구성과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하지만 인터넷에 실험데이터를 등록하는 과정을 100%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 전자연구노트를 정부차원에서 제작 보급하고 있는 특허청도 보안문제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다고 답했다. 이진구 한국특허정보원 과장은 “인터넷뱅킹용 인증서로 로그인 하도록 만들었다”며 “해당기관의 공인인증서비스도 함께 사용하도록 해 보안성을 높였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100% 안전하다고 믿는 연구자는 많지 않다.

출연연 소속의 한 박사는 “전자연구노트 도입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시스템의 보안성 문제가 많이 거론돼 아직까지 도입이 중단된 상태”라고 말했다. 해킹과 같이 연구노트시스템에 악의적으로 접근하는 사례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출연연의 한 연구원은 “전체 내용이 암호화된 상태로 저장되지 않고 있다”며 “해킹으로부터 안전하다고 해도 연구자료가 훼손되거나나 분실될 위험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우려 때문에 이미 전자연구노트를 독자적으로 개발해 사용하고 있는 한국원자력연구원도 수기연구노트제도를 병행해서 시행하고 있다. 개발된 전자연구노트 시스템도 보안 시스템을 크게 강화했다.

원자력연구원 이규정 책임행정원은 “연구소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전자연구노트는 기존의 전자결제시스템과 연동해 연구프로젝트와 관련된 사람만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출연연의 한 연구원은 “보안성 취약 문제보다는 프로그램이 얼마나 값싸게 공급되느냐가 연구노트제도 정착의 성패를 좌우될 것”라며 “특허청 시스템을 기본으로 하되 기관마다 자체개발한 프로그램이 호환되도록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승민 동아사이언스 기자 enhanced@donga.com
이재웅 동아사이언스 기자 ilju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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