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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저 그 탄생을 위한 질주

아인슈타인의 가설이 루비 속에서 실현되다
| 글 | 박진희 동국대 교양교육원 교수 ㆍpark0227@dongguk.edu |

“전자는 외부 자극 없이도 자발적으로 빛을 흡수하고 방출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하지만 특정한 빛으로 전자를 유도하면 특정한 파장의 빛을 방출할 수 있다”

레이저의 새벽은 아인슈타인이 빛의 입자성과 파동성을 함께 설명하고 싶어 논문에 제시한, 한 낯선 개념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1917년 발표한 ‘복사(radiation)의 양자 이론’에서 보어의 원자모형의 자발방출과 다른 ‘유도방출’을 처음 제시했다. 아인슈타인은 유도방출을 높은 에너지 준위(에너지 상태)에 있는 원자가 외부의 빛 에너지(광자)를 만나면, 이와 동일한 위상과 파장을 지닌 광자를 방출하면서 낮은 에너지 준위로 돌아가는 현상으로 설명했다.

이 과정에 따르면 실질적으로 광자가 두 개 방출되는 꼴이므로 빛의 세기가 들어온 빛보다 강해지는 증폭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유도방출에 의한 광(光) 증폭’의 뜻을 가진 레이저의 탄생은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유도방출 이론에서 시작됐다.





 



아인슈타인의 노트


들뜬상태(E2)에 있는 원자(전자)는 불안정하므로 시간이 지나면 바닥상태(E1)로 돌아가는데, 이때 방출되는 빛은 파장과 위상이 고르지 않다. 이런 빛을 자연방출광이라고 한다. 그런데 들뜬상태에 있는 원자에 빛을 쬐어 준다면? 원자(전자)는 위상과 파장이 이 빛과 동일한 빛을 방출하면서 바닥상태로 돌아간다. A인 빛이 들어가서 A인 빛 두 개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E2에서 E1로 되돌아올 때 광양자(빛)를 방출한다.



유도방출 이론은 이미 1917년에 등장


아인슈타인의 가설은 막스 플랑크의 양자론과 보어의 원자가설, 열역학를 바탕으로 원자 세계를 연구하던 물리학자들에게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당시 독일에서는 조명 산업이 크게 발전해 빛의 복사에 대한 폭넓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복사에 대한 연구는 양자역학으로의 길을 열었고 결국 보어는 이를 원자에 적용해 원자 모형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원자 내부 구조를 바탕으로 원자의 에너지 흡수와 방출을 설명하는 데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인슈타인이 광전 효과에 이어 제시한 유도방출 이론은 물리학계에 원자 내부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을 제공했다.



캘리포니아공대의 물리학자 리처드 톨먼이 먼저 이 가설의 검증에 나섰다. 그는 통계역학적으로 들뜬상태의 원자들의 수가 바닥상태의 원자들에 비해 매우 적어서 외부 에너지가 들뜬상태의 원자들을 만나 유도방출이 일어날 확률이 매우 희박하다고 봤다. 실제로 원자는 들뜬상태에 100만 분의 1초 이하로 지극히 짧게 머물러 광자가 유도방출을 일으키도록 타이밍이 맞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따라서 유도방출에 의해 광증폭이 일어나려면 들뜬상태의 원자들이 낮은 에너지 준위의 원자들보다 수가 많아지는 ‘상태밀도반전’이 필요했다. 이론가인 톨먼은 자신의 연구를 여기서 멈추지만 러시아의 과학자 발렌틴 알렉산드로비치 파브리칸트는 1939년에 상태밀도반전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아인슈타인의 가설이 실용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원자 내부의 탐구라는 물리학의 기본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유도방출에 주목한 것이어서 이를 실용화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아인슈타인의 원리가 레이저로 구현되는 데는 원자 내부를 들여보고자 했던 마이크로분광학자들과 레이더 시스템을 개선시키고자 한 미 국방부의 만남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① 항공기에 장착된 레이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레이더는 보이지 않는 목표물을 추격할 수 있는 군사기술로 활약했으나 멀리 있는 물체는 라디오파가 물체에 닿기 전에 확산되는 문제가 있었다.②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의 리처드 톨먼(왼쪽)은 아인슈타인의 유도방출을 이론으로 풀어보려고 했다.


‘마이크로파 증폭’ 메이저 먼저 개발돼


보이지 않는 목표물을 추격할 수 있는 레이더는 과학 전쟁이라 불리는 2차 세계 대전을 대표하는 군사기술이었다. 당시의 레이더는 파장이 m 단위인 라디오파를 사용했는데, 라디오파는 직진하지 못하고 큰 반경으로 확산돼버려 목표물을 감지하는 데 적합하지 못했다. 레이더의 감도를 높이려면 주파수가 높고 파장이 짧은 전자기파를 이용할 수 있어야 했다. 미 국방부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도 파장이 cm 단위의 단파로 작동하는 레이더를 개발하기 위해 관련 연구를 진행하는 대학에 꾸준히 지원했다.

한편 분광학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은 주파수가 높은 전자기파로 분자와 원자의 상호작용을 연구하고 싶어했다. 에너지가 낮아 분자를 들뜬상태로 만들지 못하는 라디오파 대신 에너지가 높은 마이크로파를 활용하면 분자를 쉽게 들뜬상태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찰스 타운스도 분광학을 연구하는 물리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결국 그는 전쟁 후 컬럼비아대에 자리를 잡으면서도 미 국방부의 레이더 연구에 참여하게 된다. 레이더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고주파수의 마이크로파 발생 장치를 개발하고자 한 미 국방부와 분자 내부 구조를 연구하기 위해 마이크로파 발생 장치를 필요로 한 타운스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연구를 계속하던 타운스는 1951년 분자들로 구성된 시스템이 외부로부터 전자기파를 흡수하면 들뜬 분자들이 흡수한 전자기파와 동일한 파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게 된다. 여기엔 타운스가 잠깐 일했던 벨연구소에서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벨연구소에서는 회로에 분자를 이용하는 가능성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자 시스템에 들뜬상태의 분자만 남기도록 하는 문제는 자기장이나 전기장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또 그는 공진관을 이용하면 충분한 세기의 전자기파를 발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타운스는 과거에 레이더 시스템을 연구할 때 다뤘던 암모니아 분자에 주목했다. 암모니아 분자의 회전 에너지 준위 차를 이용하면 파장이 0.5mm인 밀리미터파를 발생시킬 수 있다. 단, 이를 실현하려면 무수한 계산 작업과 정밀한 기계 기술이 필요한데, 타운스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직접 손으로 계산하고 수많은 기어와 톱니바퀴를 맞춰가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찰스 타운스의 노트 “암모니아(NH3) 가스의 분자를 마이크로파로 들뜨게 한다. 유도방출로 얻어지는 전자기파는 공진관에서 증폭된다. 전기장을 이용하면 들뜬상태의 분자만 선별하는 방식으로 상태밀도반전을 일으킬 것이다.”



1957년에 찰스 타운스가 남긴 메모(위)를 보면 그가 거울들이 달린 박스에 작은 구멍들을 뚫어 빛이 새어나오도록 하는 광학장비(메이저)를 만들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그(왼쪽)는 대학원생인 짐 고든(오른쪽)과 함께 1954년 유도방출로 마이크로파를 증폭시키는 메이저를 발명했다.

타운스의 지도 아래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짐 고든은 결국 1953년 말에야 유도방출된 마이크로파의 증폭 과정을 관측한다. 그리고 1954년 5월 1일, 마침내 타운스는 미국 물리학회에서 자신들이 만든 장비가 마이크로파 증폭에 성공했음을 발표했다. 타운스와 그의 연구원은 이 장비에 멋진 이름을 붙여주고자 그리스어, 라틴어를 동원해 고심하다가 결국 ‘유도방출에 의한 마이크로파 증폭(Microwave Amplification by the Stimulated Emission of Radiation)’의 첫 글자를 따서 ‘메이저(MASER)’로 명명했다.





하지만 타운스는 장치 개발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메이저 이론의 발견 우선권을 주장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동일한 구상을 먼저 논문으로 발표한 과학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구(舊)소련 물리학자 알렉산더 프로호로프인데, 타운스는 1955년 영국 케임브리지 패러데이 학회 모임에 참석했다가 프로호로프의 암모니아 메이저 이론 강연을 듣게 된다. 이때 타운스는 메이저 장치 실험에 관한 간단한 보고 논문만을 작성
해 저널 ‘피지컬 리뷰’에 보내 놓은 상태였다. 결국 1955년 8월에 실린 타운스의 논문은 프로호로프의 논문을 인용하는 형식을 띠게 된다. 모스크바의 레베데프 물리연구소에 돌아간 프로호로프는 패러데이 회의가 있은 지 한 달 반 만에 암모니아 메이저 제작에 성공했다.


메이저를 두고 타운스와 경쟁한 알렉산더 프로호로프.


타운스의 광학 메이저 vs 굴드의 레이저
메이저 개발이 성공하자 이제 관심은 이를 활용하는 방안으로 돌아갔다. 물리학자들은 무엇보다 분광학 분야 실험에 메이저를 활용하고 싶어했다. 미 국방부에서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정확도를 높이는 원자시계와 군사 레이더 시스템에 활용했다. 타운스가 개발한 메이저는 증폭기능이 뛰어났기 때문에 장거리 통신과 우주에서 오는 마이크로파를 포착하는 데도 이용됐다.

실제로 타운스는 메이저를 이용해 우주에 존재하는 복잡한 분자를 관측하고 우리은하 가운데에 있는 블랙홀의 질량을 처음 재는 성과를 얻었다. 노이즈가 거의 없고 마이크로파를 증폭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전파 천문학에서도 메이저를 주목했다. 덕분에 메이저 연구는 이내 붐을 맞이했다. 실용적으로 활용하기 좋은 고체 메이저와 합성 루비 메이저도 빠르게 개발됐다.





메이저를 통해 마이크로파를 발생시킬 수 있음이 입증되자, 과학자들은 이제 파장이 짧고 주파수가 큰 전자기파, 즉 빛을 발생시키는 증폭 장치를 꿈꾸게 된다. 타운스도 미 컬럼비아대에서 같이 공부한 벨연구소의 아서 숄로와 함께 메이저의 유도방출을 가시광선과 적외선영역으로 확장시키는 연구를 진행했다. 이들은 메이저처럼 기체 원자에 특정 에너지 준위로 들뜨게 하는 빛을 입사시키면 같은 파장의 빛이 유도방출될 것(광학 펌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빛을 방출하는 성질이 좋은 칼륨과 세슘에 평행거울을 이용한 간섭계로 단일 파장의 빛을 만들어 쬐어주는 구조를 설계했다. 비록 별다른 성과는 없었으나 타운스와 숄로는 이 광학 메이저에 대한 이론을 논문으로 작성해 1958년에 발표하고 1960년에는 특허를 획득했다. 타운스에게는 메이저를 두고 구소련과 우선권 논쟁 다툼을 벌였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논문 발표를 서둘렀다.



1955년 영국 국립물리연구소의 루이스 에센은 세슘 원자가 에너지 준위를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초’로 정의하는 원자시계를 개발했다.





(왼쪽)타운스가 1958년에 광학 메이저에 대한 이론을 정리해 발표한 논문. 비록 그는 빛을 증폭시키는 데 성공하진 못했지만 메이저를 두고 구소련 연구진들과 경쟁한 기억 때문에 서둘러 논문을 발표했다.(오른쪽)타운스의 암모니아 메이저가 개발된 뒤 곧이어 고체 메이저와 합성 루비 메이저처럼 활용하기 좋은 메이저들이 개발됐다. 오른쪽 사진은 할로겐 메이저.




한편 비슷한 시기에 컬럼비아대 대학원생인 고든 굴드도 광학 펌핑을 이용한 빛 유도방출의 가능성을 구상하고 있었다. 재미난 것은 타운스를 후원한 컬럼비아대의 이시도어 아이작 라비 교수가 굴드에게도 광학 펌핑 실험을 권유했다는 점이다. 유럽 회의에서 광학 펌핑에 매료돼 돌아온 라비 교수는 대학원생이던 굴드에게도 이 실험을 제안했던 것이다. 이런 계기로 굴드는 타운스와 숄로 팀과 별도의 광학 메이저 장치를 구상하게 된다.






굴드는 칼륨 증기를 채운 투명한 튜브에 밝은 빛으로 칼륨 원자를 들뜨게 하고 튜브 양 끝에 평행 거울을 달아 빛을 증폭시키는 구조를 구상했다. 매질이 같고 굴드의 평행 거울이 숄로의 간섭계와 동일하게 작동한다는 점에서 굴드의 장치는 숄로의 광학 메이저와 흡사하지만 유도방출된 빛을 집속시켜서 높은 출력으로 만든다는 점이 다르다. 즉 숄로는 광학 메이저를 ‘단일 파장’의 빛이 나오는 발진 장치로 본 반면, 굴드는 자신의 장치를 제한된 파장의 빛을 공진시켜 에너지를 높이는 데 중점을 뒀던 셈이다. 굴드는 평행 거울을 잘 조정하면 빛을 작은 점에 모이게 할 수 있고 이 빛의 세기는 당시 존재하던 어떤 빛보다 강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든 굴드는 레이저의 이름을 처음 짓고 오늘날 레이저의 거의 모든 개념을 소개했지만 학자보다는 발명가와 사업가로서 삶을 더 즐기다가 레이저를 실용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작은 지점에 모인 빛은 태양 표면보다 온도를 높일 수 있고 딱딱한 물체에 구멍을 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봤다. 그가 만들고자 한 것은 오늘날의 레이저 빔 장치의 원형인 셈이다. 1959년 6월 미시간대에서 열린 광학 펌핑에 관한 회의에서 굴드는 자신의 구상을 ‘유도방출에 의한 빛의 증폭(Light Amplification by Stimulated Emission of Radiation)’, 즉 레이저(LASER)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렸다. 하지만 회의에 참석했던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굴드의 장치가 광학 메이저와 어떻게 다른지 이해하지 못했다.






고든 굴드의 노트 레이저는 빛 증폭기이다. 일반적인 전자기파는 좁은 면적에 집광시켜 에너지의 밀도를 높여도 열원(T1)보다 높은 온도는 만들지 못한다(T2). 하지만 레이저광은 열원의 온도(T3)보다 높은 온도(T4)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인류 최초의 레이저는 루비 레이저
이제 레이저 개발에서 선두를 차지하기 위한 본격적인 경쟁이 펼쳐졌다. 벨연구소와 TRG(Technical Research Group) 같은 대규모 기업연구소의 지원을 받게 된 타운스와 숄로, 굴드는 비교적 탄탄한 입지를 갖추게 된다. 타운스와 숄로는 헬륨, 네온 기체를 전기 방전시키는 방안을 좇았다. 숄로는 광학 메이저를 구상하던 초기에 루비(Al2O3)를 매질로 사용하는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으나 이내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포기했다. 굴드는 TRG에서 칼륨 증기로 실험을 계속했지만 1960년까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미국 유수의 연구소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사이에, 휴즈 사에 소속된 작은 기술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시어도어 메이먼도 레이저를 개발하기 위한 실험에 속도를 내고 있었다. 그는 벨연구소에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루비를 매질로 사용했다. 루비 결정의 성분인 산화알루미늄에는 원자의 일부가 크롬 원자로 대체돼 있어 유도방출한 빛이 붉은빛을 냈다. 또한 다른 연구팀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플래시 램프의 펄스광을 사용했다. 램프의 모양은 매질이 광원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게 코일 형태로 만들었다. 무엇보다 메이먼은 작동하는 레이저를 만들기 위해 매질, 광원, 구조를 최적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마침내 1960년 5월 16일, 메이먼의 루비 레이저가 붉은빛의 빔을 내며 오실로스코프에 특유의 레이저 빔 그래프를 그렸다. 인류의 첫 레이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비록 그 발광시간은 200만 분의 1~300만 분의 1초 정도로 지극히 짧았지만 출력은 약 1만W에 달했다.









시어도어 메이먼의 노트 합성 루비는 지름 1cm의 원기둥 모양으로 만들고 이 끝에 거울을 단다. 한쪽 거울은 100% 전반사경, 다른 쪽 거울은 50% 반사경으로 하면 50% 반사경 쪽으로 빛이 나온다. 루비의 결정 성분인 산화알루미늄에는 원자의 일부가 크롬 원자이므로 여기서 나온 빛은 파장 694nm의 붉은빛을 띨 것이다. 플래시 램프는 루비 막대와 닿는 면적이 넓도록 코일 형태로 감는다.







시어도어 메이먼(왼쪽)은 1960년 루비 막대에 플래시 램프를 코일 형태로 감은 루비 레이저(오른쪽)를 개발했다.

레이저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다양했다. 그해 7월 7일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메이먼이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레이저가 죽음의 광선인가” 하는 것이었다. 개발되기도 전부터 레이저가 영화와 만화에서 광선 무기로 인식되고 있었던 탓이었다.

일부 잡지들에서는 레이저가 라디오 송신, 야간 탐색, 세균 박멸 같은 일에 사용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메이먼 자신은 레이저가 통신뿐 아니라 절단과 용접 같은 산업 부문에서 이용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레이저의 용도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메이먼의 성공으로 이내 벨연구소를 비롯한 다른 연구소들이 연구 속도에 불을 붙였다. 1960년 12월 알리 자반과 윌리엄 베넷, 도널드 해리엇이 헬륨 네온 레이저 개발에 성공했다. 최초의 가스 레이저였다. 펄스 광원을 사용한 메이먼의 레이저가 연속 빔을 만들지 못했던 것에 비해 벨연구소의 가스 레이저는 처음으로 연속 빔을 만들어냈다. 이는 통신용으로 레이저를 이용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같은 해 11월에는 후발주자였던 IBM의 피터 소로킨과 미렉 스티븐슨도 메이먼의 루비 레이저에서 사용한 광원의 500분의 1 정도의 광원을 사용하는 우라늄 고체 레이저를 만들었다. 이는 펄스 광원 대신 일반 연속광을 이용해도 벨연구소의 가스 레이저 같은 연속 빔을 만들 수 있음을 뜻했다.

이어 TRG에서도 1962년 3월 세슘 레이저 실험에 성공해 굴드의 아이디어를 입증했고, 그해에 로버트 홀은 오늘날 레이저 상용화에 공헌한 반도체 레이저를 개발했다. 반도체 특성에 바탕을 둔 반도체 레이저는 상온에서 잘 작동하므로 CD 및 DVD 플레이어, 상점의 바코드 시스템에 레이저를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이로써 레이저를 향한 경주는 마무리됐다.



레이저 개발에 뛰어든 과학자들의 명암
레이저는 여러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최초의 수상자는 메이저를 개발한 찰스 타운스와 메이저에 대한 이론을 먼저 정립했던 니콜라이 바소프, 알렉산더 프로호로프이다. 타운스는 메이저와 레이저의 선도적 연구에 대해, 구소련의 학자 두 명은 1954년에 발표한 유도방출에 의한 광증폭의 아이디어와 암모니아 분자를 사용한 메이저의 기본 원리로 1964년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이후 레이저광으로 홀로그래피를 발명한 영국 런던대의 데니스 가보는 1971년에, 메이저를 이용해 빅뱅이 일어났을 때 생긴 마이크로파(우주배경복사)를 발견한 벨연구소의 아노 펜지어스와 로버트 윌슨은 1978년에, 타운스와 함께 레이저를 발명했던 아서 숄로는 비선형광학분야로 니콜라스 블룸베르겐과 함께 1981년에 각각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세계에서 최초로 레이저 발진에 성공한 시어도어 메이먼은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레이저 개념의 창시자인 굴드도 과학자로서의 명예를 찾지는 못했다. 그는 특허 출원에도 실패하고 자신의 레이저도 완성하지 못했다. 학자보다는 발명가와 사업가로서 삶을 더 즐겼던 굴드는 레이저로 특허 출원을 하려고 했으나 특허에 필요한 문서를 잘못 이해해 출원을 미루고 말았다. 게다가 TRG에서 미 국방부 연구자금으로 자신의 레이저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과거 마르크스주의자 그룹에서 활동한 경력이 드러나 연구에 직접 참여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결국 굴드는 후일 미국 국립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기록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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