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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타임캡슐 씨앗


| 글 | 강석기ㆍsukki@donga.com |


지난 7월 초, 경남 함안박물관 앞마당에 분홍빛 연꽃 한 송이가 피었다. 고려시대에 맺힌 씨앗이 땅속에서의 오랜 잠을 깨고 700년 만에 발아해 마침내 꽃을 피워낸 것이다.
도대체 씨앗이 어떻게 이런 장구한 세월 동안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씨앗은 식물의 수정란이 배라고 불리는 작은 식물체로 자란 뒤 성장을 멈추고 영양분(배젖)과 함께 껍질(종피) 속에 감싸여 있는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씨앗은 싹을 틔워도 신호가 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때로는 씨앗이 여물자마자, 때로는 이번 경우처럼 수백 년이 지난 뒤에 발아한다.
이동성이 없는 식물에게 씨앗은 각별한 의미가 있는 존재다. 새로운 땅을 찾는 이동수단일뿐더러 극심한 가뭄이나 병충해로 식물체가 사라지는 악조건에서도 씨앗은 살아남아 종을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감수분열 과정에서 유전자 조합이 일어나므로 모든 씨앗은 고유한 유전체를 갖고 있다. 식물 진화의 바탕인 셈이다. 이번에 꽃을 피운 ‘아라홍련’의 내레이션으로‘생명의 타임캡슐’인 씨앗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아라홍련이 들려주는 씨앗 이야기
무덥던 여름도 이제 끝나가는군요.



안녕하세요, 여러분. 제 이름은 ‘아라홍련(阿羅紅蓮)’입니다. 무슨 뜻이냐고요?

제가 지금 살고 있고 작년에 씨앗 상태로 발견된 경남 함안 일대가 예전에 가야국 연맹의 한 곳이었던 아라가야 지역이었거든요. 홍련은 꽃잎이 붉은 색조를 띠는 연꽃입니다. 제가 올해 분홍빛 꽃을 피우자 저를 돌보고 있는 함안 박물관 분들이 이런 예쁜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매스컴을 통해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700년 전 땅 밑에 묻혀 잠자고 있다가 작년에야 사람들에게 발견돼 이렇게 식물체로 자라났습니다. 씨앗일 때부터 나이를 친다면 700살인 셈이죠. 하지만 사실 땅속에 묻혀 있는 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으니까 전 그냥 ‘우리나이’로 두 살이라고 하는 게 더 좋습니다.



‘어떻게 700년 동안 씨앗이 살아 있었을까?’

이런 궁금증이 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제가 생각해도 놀랍긴 합니다. 보통 씨앗은 수 년, 길어야 수십 년이 지나면 생명력을 잃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외없는 법칙은 없는 법! 저는 독특한 씨앗 구조와 절묘한 환경 덕분에 이렇게 생명력을 유지한 것이지요.




단단하고 방수되는 과피
저희 연꽃은 아시다시피 불교에서 신성시하는 식물입니다. 예로부터 인도나 중국, 그리고 한반도에 자생했죠.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에는 아마 지금보다 저희가 훨씬 번창했었겠죠. 연꽃을 자세히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생각해도 정말 꽃이 특이하게 생겼습니다. 꽃 한가운데가 마치 샤워꼭지를 위로 향하게 붙여놓은 것 같으니까요.



사실 이건 ‘꽃턱(화탁)’, 즉 꽃의 각 기관이 달리는 꽃자루의 끝부분입니다. 샤워꼭지 구멍 하나하나마다 씨방이 들어 있지요. 구멍이 노랗게 보이는 건 암술머리 때문인데 꽃잎이 내는 강한 향을 맡고 찾아온 벌들이 꽃가루를 떨어뜨리면 수분이 일어나죠. 저도 올해 처음 꽃을 피웠는데 어디서들 알고 왔는지 새벽부터 찾아온 벌들 등쌀에 잠을 못자겠더라고요. 물론 제 향기가 보통 향기는 아니죠. 오죽하면 사람들이 연꽃봉오리 안에 녹차 잎을 넣어두겠어요.






씨앗


아무튼 수정이 끝나면 꽃은 시들고 씨가 여물죠. 저희는 보통 꽃 한송이에 10~20개의 씨앗이 맺힌답니다. 가을이 오고 꽃대가 말라비틀어져 꺾이면 샤워꼭지가 아래를 향합니다. 이럴 때 바람이라도 한 번 세차게 불면 씨앗이 빠져나와 아래 수면으로 떨어지지요. 그럼 대부분은 물에 가라앉고 좀 부실해 속이 좀 빈 녀석들은 물에 뜨기도 하지요.



아무래도 ‘씨앗’이 얘기의 핵심이니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해야겠네요. 사실 이번에 발견된 건 씨앗이 아니라 연꽃 열매입니다. 물론 꽃턱에서 익어 떨어진 것도 열매이지요. 저희처럼 생긴 열매를 ‘소견과(nutlet)’라고 부릅니다. ‘그럼 열매랑 씨앗이랑 차이가 뭐야?’ 이런 의문이 드실 분도 있을 텐데, 간단히 말해 과피(果皮) 속에 씨앗이 들어있는 게 열매입니다. 과피는 밑씨를 감싸고 있는 씨방이 변해서 된 조직이지요. 밑씨가 수정해 성숙한 게 씨앗이고요.



열매는 형태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는데 소견과나 견과(nut)는 과피가 딱딱한 열매이지요. 그래서 저희 같은 열매는 종종 씨앗과 헷갈립니다. 사실 연꽃 씨앗이 그토록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무척이나 단단한 과피가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이 스며들지 못할 정도입니다. 따라서 이 상태로 그냥 두면 안에 있는 씨앗이 발아를 못하죠.













700년 전 고운 흙 속에 묻혀 사계절 내내 거의 일정한 서늘한 온도에서 있었으니 제가 씨앗 상태로 있었을 때 일어난 일이라고는 물리적 현상인 동위원소 붕괴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저는 동료 씨앗 11개와 함께 발굴됐는데 저희 나이를 추측한 게 바로 방사성탄소 동위원소(14C)를 이용한 연대측정법입니다. 14C는 약 5730년의 반감기로 14N으로 붕괴하기 때문에 화석(예외적으로 저희 같은 생명체)의 탄소에서 14C가 차지하는 비율을 알면 그 화석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죠. 저희 경우 씨앗 두 개를 갖고 연대측정을 했는데 하나는 650년 전, 하나는 760년 전이라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과피가 그렇게 딱딱하다면 자연상태에서 어떻게 싹이 틀 수 있는지 궁금하시다고요?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토양미생물로 과피가 약화되거나 물결에 따라 여기저기 휩쓸려 가고 돌이나 바위에 부딪치면서 과피가 깎여나가고 깨지면서 안으로 물이 스며들어 발아가 시작되는 것이죠. 따라서 연꽃 씨앗은 수년에서 수십 년, 때로는 저희처럼 수백년 만에 발아가 되는 것입니다. 별 특이한 씨앗도 다 봤다고요? 아, 씨앗이 식물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아신다면….








씨앗 하나 무게가 20kg
“이제 이 고장에 뿌리를 내리겠습니다!”



사람들은 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는 의미로 ‘뿌리를 내린다’는 비유를 즐겨 사용합니다. 물론 저희 식물은 글자 그대로 ‘뿌리를 내린채’ 살아가는 존재들이죠. 한번 자리를 잡으면 오도 가도 못하는 저희 식물의 숙명에 ‘동물’인 여러분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요? 지난 여름 유례없는 무더위와 가뭄으로 러시아 곳곳에서 자연발화가 일어나 수많은 숲이 숯덩이가 됐습니다. 숯덩이의 대부분이 ‘뿌리 내린’ 저희 식물들이었죠.



이런 식물들에게 씨앗이야말로 유일하게 시공여행을 할 수 있는 수단이지요. 씨앗을 퍼뜨려 모(母) 식물체에서 멀어지는 공간여행은 이해가 되는데 시간여행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요? 바로 제가 700년간의 시간여행을 하지 않았습니까? 누군가는 씨앗을 가리켜 ‘생명의 타임캡슐’이라고 불렀는데 멋진 표현 아닌가요.



사실 흙속에는 다양한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각자 발아에 적합한 조건이 올 때까지 숨죽이면서 기다리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상태를 가리켜 ‘토양종자은행(soil seed bank)’이라고도 합니다.



씨앗을 만드는 식물은 겉씨식물 1000여 종, 제가 포함된 속씨식물 42만 여 종이 있습니다. 겉씨식물은 소나무나 은행나무처럼 씨방 없이 밑씨가 노출돼 씨앗이 맺히는 식물이죠. 속씨식물은 밑씨와, 밑씨를 감싼 씨방이 함께 성숙해 열매를 맺는 식물이구요. 이들이 오랜 세월 동안 진화시킨 씨앗의 다양한 모습은 제가 봐도 놀라울 정도입니다. 각자 주어진 환경에서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한 노력의 결과지요.




연꽃과 수련은 가까운 친척?
많은 분들이 저희 연꽃과 수련(사진. 인상파 화가 모네가 말년에 즐겨 그린 대상이지요)이 가까운 친척이라고 생각하십니다. 심지어는 둘이 같은 종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해 “수련은 연꽃이 물(水) 위에 사니까 그렇게 부르는 거 아냐?”라고 얘기하시는 분도 있더군요. 물론 아닙니다. 그리고 저희 둘 사이는 그렇게 가깝지도 않습니다.



물론 연꽃과 수련의 꽃 모양이 아주 비슷하고 사는 환경도 유사하기 때문에 식물분류학자들조차 연꽃과 수련을 가까운 친척으로 분류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수련과(科)와 연꽃과를 수련 목(目) 아래 뒀죠. 분류단계인 ‘종속과목강문계’ 아시죠?









그런데 최근 분자유전학, 즉 DNA의 염기서열을 분석하는 기술이 분류학에 도입되면서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연꽃과는 마카다미아(맛있는 너트가 열리는 식물입니다)가 속하는 프로테아과와 플라타너스(가로수로 많이 심는 잎이 손바닥처럼 갈라지는 커다란 나무죠)가 속하는 버즘나무과와 함께 프로테아목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이런 나무와 더 가깝다니 사실 저도 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왜 외모는 수련과 이토록 흡사할까요? 이런 걸 ‘수렴진화’라고 한다네요. 다른 종이라도 비슷한 환경(위치)에 적응해 진화하는 과정에서 형태가 비슷해진다는 거죠. 지금은 멸종한 테즈메니아 늑대가 수렴진화의 대표적인 예로, 생긴 건 늑대지만 사실은 캥거루처럼 유대류 동물이죠.




씨앗의 다양성은 크기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씨앗은 어떤 식물의 것일까요? 쌍둥이 야자(coco de mer)라고 불리는, 야자나무과에 속하는 나무의 씨앗으로 씨앗 하나의 무게가 무려 20kg나 나간답니다. 엄청나게 크다 보니 꽃이 수정을 해 열매가 여무는 데 7년이나 걸린다는군요.



반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은 난초류(열대지방의 기생란)의 것으로 무게가 0.5μg(마이크로그램, 1μg=10-6g)도 채 안 나간다는군요. 쌍둥이 야자 씨앗이 난초 씨앗보다 400억 배나 무거운 셈입니다! 왜 이런 엄청난 차이가 나는 걸까요. 물론 각자 생존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찾다 보니 그렇게 됐을 겁니다.



쌍둥이 야자는 극단적인 경우지만 사실 야자나무과 식물들의 씨앗은 대체로 큰 편입니다. 야자나무가 해안가 모래토양에서 주로 자라다 보니 뿌리가 충분히 내리기 전에는 토양에서 영양공급이 제대로 안 됩니다. 따라서 씨앗 속에 저장된 영양분으로 자리를 잡아야했지요. 반면 반(半)기생생활을 하는 난초류는 숙주를 만나야 하므로 씨를 극도로 작게해 개수를 늘린 셈이죠. 가장 작은 난초 씨앗의 경우 1g에 200만 개가 넘으니까요.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신경쓰는 사람을 ‘좁쌀영감’이라고 하고 약간의 믿음이라는 뜻으로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는 표현도 있듯이 작은 씨앗은 보잘 것 없음을 뜻하는 비유적 표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비록 맨눈에는 ‘깨알’만 하게 보이는 씨앗이지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놀라운 아름다움이 숨어 있습니다. 대체로 씨앗이 작을수록 더 환상적인데, 씨앗 껍질의 세포 하나하나가 상대적으로 더 확대돼 보이기 때문입니다.



작고 하얀 꽃이 마치 별처럼 보이는 예쁜 별꽃은 씨앗 표면도 별 모양입니다. 씨앗은 크기가 1mm밖에 안 되는데 씨앗껍질, 즉 종피(種皮)를 이루는 세포들이 별 모양으로 생겨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각퍼즐 같지요. 이처럼 세포가 맞물려 있는 이유는 단순히 벽돌처럼 평평한 면이 맞대고 있는 것보다 훨씬 튼튼한 껍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죠.



잎에 세로로 주름이 나 있는 주름제비란은 씨앗에도 주름이 자글자글합니다. 주름제비란 씨앗은 길이가 0.7mm, 폭이 0.2mm밖에 안 되기 때문에 종피의 세포 하나하나가 마치 벌집처럼 또렷이 보입니다. 자세히 보면 바깥면의 세포벽은 떨어져 나갔고(따라서 세포끼리 닿아 있는 세포벽이 확연이 드러납니다) 배를 감싸고 있는 안쪽 세포벽의 주름이 보입니다. 이런 망상(罔象) 구조는 최소한의 재료로 튼튼한 구조물을 만들 때 이용되지요.



아주 작은 씨앗의 경우 이처럼 종피의 바깥쪽 세포벽이 떨어져 나간 경우가 많은데, 씨앗 무게를 최소화해 좀 더 멀리, 오랫동안 바람을 타고 퍼지게 진화한 결과라고 하는군요. 이런 친구들에 비하면 크기가 1cm가 넘는 저희 같은 씨앗(또는 열매)은 확대해도 맨눈으로 보는 모습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전체가 다 나오려면 높은 배율로 확대할 수가 없으니까요. 다만 왁스층이 덮여 있어 물이 침투하지 못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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